언제나 시작은 눈물로
- 우리는 진보하고 있다.

장석준(민주노동당 선거대책본부 정보통신부장)


16대 총선에서 보수정당들과 겨룬 민주노동당의 총선 성적은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후보가 출마한 지역에서 평균 13.09%의 득표를 했지만 당선자는 한 명도 내지 못했다. 국민들은, 비록 선거 이후 시청하긴 했지만, 아무튼 KBS, MBC의 르포를 보고 뒤늦게 민주노동당에 대한 호감과 아쉬움을 표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민주노동당은 기대하던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표를 통해 이루려던 더 본질적인 목표는 얻은 셈이다. 즉, 국회의원은 한 명도 내지 못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국민적 위상은 전보다 비할 바 없이 높아진 것이다.
가장 당선이 확실시되던 울산 북구에서 몇백표 차로 패배하고 만 것에 대해서는 추후 당의 공식적인 평가가 있을 것이다. 모두의 기대대로 이는 냉정하고 철저한 평가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당 내의 건전한 분파 활동이 자파 이기주의적인 당내 정쟁으로 비화된 점이나 그것이 결국 선거운동 기조를 교란한 점 등에 대해서는 엄정한 비판 과정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평가를 이런 문제로만 제한한다면 민주노동당의 앞길에 도약의 디딤돌을 놓을 수 없다. 창원을과 울산 북구, 이 두 선거구에서 노동자 후보가 석패한 이유를 곰곰히 따져보면 우리가 맞닥뜨린 보다 중요한 문제가 드러난다. 혹자는 결국 지역주의 때문이라면서 경상도 민심을 원망하기도 하지만, 이는 변명이 되지 못한다. 우리가 지역주의의 존재를 몰랐던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지역주의와 대결해서 이기지 못한 이유를 찾아내야만 한다.
개인적 견해로는, 현재 존재하는 노동조합운동의 바깥에 존재하는 광범한 민중들을 하나의 대오로 모아내는 데서 나타난 미숙함을 들고 싶다. 최용규 후보나 권영길 후보는 노동자 밀집지역에서는 분명히 승리를 거두었다. 패배를 낳은 것은 상인, 어민 등 비노동계급 인구가 주로 거주하는 투개표구였다. 사실 이 부분에서 민주노동당은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게 아니다. 상가임대차보호법 제정 공약을 주무기로 하여 중소상인 계층의 이해에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결국 그 효과는 단기적으로는 나타나지 못했다.
문제는 과거처럼, "그러니까 보다 대중적인 이미지가 필요해"라는 식으로 당의 우경화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의 급진성과 온건성이 문제인 게 아니다. 일하는 민중의 각 계층에 대해 실질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진보적인 주장들을 갖고, 장기적으로 꾸준히 다가가는 것이 필요하다. 전자를 위해서는 "노동시간 단축"이나 "정리해고제 폐지"에만 그치지 않는 한국사회 전반에 대한 변혁의 청사진과 그에 기반한 대중적인 정책들이 필요할 것이다. 후자를 위해서는 풀뿌리 보수주의가 지배하는 한국의 지역사회에 진보정치의 싹을 일구는 장기적인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과제들에 직면하여 민주노동당은 좌절과 혼돈보다는 오히려 희망과 가능성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이런 작업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진보정당과 이를 중심으로 한 진보적 대중운동들뿐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기 때문이다. 총선시민연대 운동은 중앙의 언론 플레이를 통해 단기적인 특수(特需)를 만들어낼 수는 있었지만 그들이 말하는 '시민사회'의 실제 지배구조에 접근해 그것을 바꿔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단기적인 성과 여부와 상관없이 어쨌든 후보 출마 지역의 풀뿌리 보수주의의 근간에 접근해 민중들의 가슴을 흔들어놓았다. 한 번 마음을 움직인 민중들은 우리와 함께 울었다. 아니 적어도 우리의 눈물을 이해해주었다. 시작은 결국 이렇게 되어야만 한다.


/ 언론노보 279호(2000.4.19)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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