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개 노조 2만 조합원 하나로 뭉친
언론노동자 철옹성


교섭권 통일된 단일조직체
선봉에 선 KBS노조 5월 총투표
서구 2백년 걸친 투쟁 끝 쟁취
노조 존립을 위한 마지막 보루



총선이 끝났습니다. 이번에도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문턱을 못 넘었습니다. 그러나 잘 싸웠습니다. 출마한 지역은 평균 13%의 득표율을 기록함으로써 그 가능성은 충분히 열었습니다. 시간이 문제입니다. 또한 진보정당과 산별노조는 함께 가는 쌍두마차입니다.
다만, 이번 총선을 계기로 한국의 정치 지형이 보수 양당 체제로 굳어지지나 않을까 우려됩니다. 그리고 추진 주체들이 상실감에서 빨리 벗어나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는 것이 중요할 듯 합니다. 분투한 언론동지들, 그리고 함께 한 조합원 동지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가칭)전국언론미디어노동조합으로 가는 길은 고갯마루쯤 다달았습니다. 단위노조별 순회간담회와 교육은 꾸준히 진행되고 있고 조합원들의 관심도 조금씩 높아지고 있습니다. 연맹의 최대 노조인 KBS는 지난 3월 집행위원회와 대의원대회를 통해 산별노조를 결의한 상태입니다. 4월 말부터는 포스터와 문답집 등 홍보물이 집중적으로 나올 예정입니다. 그리고 5월 중순 산별노조 건설을 위한 언론노동자등반대회와 최종 규약 확정을 거쳐 5월 말부터는 단위사별 조합원 투표에 들어가게 됩니다.

단위노조 위원장님들을 만나 토론하면서 느꼈던 몇 가지를 소개하면서 얘기를 풀어갈까 합니다. 단위노조 간부들이 산별노조를 보는 눈은 대략 이런 것들인 것 같습니다. 전체적인 흐름이나 원칙적으로는 산별노조로 가는 게 맞고 동의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조합원들의 관심이 거의 없으며, 또한 산별노조로 갔을 때 달라지는 지점 - 교섭의 문제, 재정의 문제 등 - 에 대한 막연한 부담이 솔직히 있다. 우리끼리도 잘 할 수 있는데 굳이 산별로 가야 하나. 대략 이런 고민들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유럽식의 완성된 산별노조는 수십 년이 걸리는 사업으로 우리가 추진하는 산별노조는 '한국적 산별노조'이다. 이것은 기존의 기업별노조에서 단계적으로 발전하는 산별노조이다. 따라서 재정의 중앙집중은 단위노조의 부담을 최소화시키는 수준에서 결정되며 교섭 체결권 역시 지금처럼 단위사별 교섭이 주류를 이루며 특별히 문제가 있는 사업장에 한해 대각선교섭이나 공동교섭을 추진하게 된다.
그러므로 단위노조 간부들의 고민은 산별노조에 대해 조금은 과도하게 받아들인 데서 비롯된 측면이 큽니다. 또한 조합원들의 무관심 역시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어용노조가 아닌 이상 조합원들은 집행부가 추진하는 사업에 대부분 동의하며 지지를 보냅니다. 언론노보와 단위사노보, 포스터 등의 홍보물이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적어도 언론노동자들은 대세를 거스르지 않는다고 우리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특수한 몇 개의 노조(항운, 선원 등)를 제외하고 한국의 모든 노조는 기업별노조입니다. 산별노조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기 전에는 대부분의 조합원들에게 노조는 기업별노조였습니다. 기업별노조를 노조의 전부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기업별노조가 한국과 일본에만 있다는 사실, 노조의 조직형태 중 노동자에게 가장 불리한 조직형태라는 사실도 최근에야 알았습니다(기업별노조를 영어로는 흔히 '집 안 노조 house union, in-house union'라고 부릅니다. '회사노조 company union'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결국 이런 노조는 기업의 담장 안에 갇힌 노조, 나아가 결국 노사동일체주의적인 협조주의 노조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영어로 company union은 다른 말로는 곧 '어용노조'가 됩니다. 독일에서는 한 때 이를 법으로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기업별노조는 노동조합 스스로가 조직범위를 가장 작게 최소화하는 조직입니다. '특정 기업체에, 현재 고용 중인 자 중에서, 정규직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하고, 그 중에서도 특정 직종(직급) 종사자는 제외하는 노조'입니다. 그러므로 기업별노조는 내부적 차별의 조건을 노조 스스로가 안고 있는 조직이라는 점에서 지극히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인 조직형태입니다.
산별노조는 특정 직종과 숙련 수준에 상관없이 특정 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노동자를 조직하는 노동조합입니다. 유럽의 대부분 노조는 산별노조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것은 서구 노동운동 이 백년 역사의 산물입니다. 간난신고(艱難辛苦)의 투쟁 끝에 쟁취한 조직형태로 노동-자본의 대결에서 가장 나은 조직임을 역사가 웅변하는 것입니다. 서구의 산별노조는 최근에도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본래 산별노조의 조직원칙은 '최대한 다수의 노동자들을 하나의 단일한 조직으로 편재하는 것'입니다. 서구 산별노조는 산업의 경계를 뛰어 넘어 규모를 최대화(독일 금속노조, 상업 공공노조)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국경을 넘어 국제노조를 조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진하는 산별노조는 세계의 흐름에 한참 뒤쳐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야 합니다. 왜? 노조를 계속 유지하고 힘을 키우기 위해서입니다. 늦더라도 산별노조가 노동조합을 살리는 길입니다.

가끔, 이런 물음이 있습니다. 산별이면 다냐?
그렇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산별노조는 현재 기업별노조가 안고 있는 문제를 모두 해결해주지도 않거니와 미래를 보장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기업별노조로 있는 것보다는 노동조합의 존립이나 발전에 유리하다는 점입니다. 유럽의 산별노조 같은 장밋빛 미래는 살아남은 다음의 일입니다. 민주노총이나 산별 연맹 간부들이 목적의식적으로 산별노조를 추진하는 심정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 그 이상 이하도 아닙니다.

박강호(산별추진위 조직위원장)


/ 언론노보 279호(2000.4.19)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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