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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반민주언론전통


사람 누구나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모여 공동체의 언론을 이루게 되는 것이지만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집단적 현실적 언론형태는 언제나 지배세력의 중요한 사회적 통제수단이 되어왔다. 이것은 마치 실정법이 언제나 지배세력의 억압수단이 되는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사회 성원 다수의 권익요구와 생각의 결집에 의해 운영되는 민주사회에서라면 언론은 민주사회세력의 지배수단이 될테지만, 소수의 가진자(권력·자산) 지배사회에서라면 당연히 그 언론형태는 비민주적 혹은 반민중적 통치수단으로만 존재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2천년 인류역사가 입증해 주고 있다.
우리사회의 경우 지나간 역사 100년간을 따져보면 지배수단으로서의 언론권력의 귀속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인류사회의 침탈·지배구조는 일반적으로 군대·경찰 등 폭압기구와 교육·언론·종교 등 설득기구에 의한 근로민중 통제장치로 짜여져 있었다. 절대군주시대의 봉건사회가 그랬고, 제국주의 침탈시대의 식민지 통치형태에서 그러한 특징은 더욱 분명했다. 한반도에서 이상의 두가지 통치수단이 침략외세에 의해 장치되어 위력을 발휘해온지는 꼭 100년이 넘는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한반도에 대한 무력침공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청일전쟁때(1894)부터였다. 일제는 한반도의 종주국 행세를 하던 청나라를 전쟁으로 물리치는 과정에서 조선의 정치·경제·군사체제를 면밀히 분석·난도질하여 해체시킬 수 있는 정보를 확보했다. 그들은 또 한반도를 노리고 접근한 여러 제국주의 나라들 가운데 러시아를 적수로 지목, 선제공격으로 패퇴시키면서 조선반도 전역을 수개사단병력으로 완전 점령한다. 군대와 헌병경찰에 의해 전국의 통치조직을 거의 접수한 가운데 외교와 교육 등에서 '보호국'을 억지로 가장하게 된다(1905년).
바야흐로 식민지 지배장치인 「폭압기구」와 「설득기구」를 대충 갖추게 되었다. 조선민족의 "소망에 의해 합병"이 이루어진 것처럼 합병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온갖 조치들이 5년안에 조작되었다. 일제는 보안법(1907년)과 경찰령으로 집회·결사의 자유를 완전 통제하고 신문지(규제)법(1907년)과 출판(통제)법(1909년)으로 일체의 문서나 인쇄물·신문 등 언론의 자유를 살인적 엄벌로 말살시켜갔다. 그러니까 합병(1910년) 이전에 이미 조선반도는 완전히 일제의 철권통치하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병 10년째 전국토를 일제에게 빼앗긴 조선민족이 3·1 봉기로 궐기하자 당황한 일제는 근로민중의 결사항전을 꺾을 방도로서 조선인 지주·자본가·지식인들을 친일 앞잡이로 끌어들여 신문을 만들게 함으로써 지하(地下)운동을 지상(地上·紙上)으로 끌어내어 제민족과 민중을 억압, 독립의지를 말살케 할 목적으로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술책을 쓰게 된다.
적극적으로 지배세력의 편만들면서 근로민중을 반공의 나락으로 밀어넣으려 애써온 한국언론의 본성과 전통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훈련받았다. 미군점령후에도 친일배족적 언론의 성향은 그대로 친외세 반민중 언론으로 발전되었고, 이어서 후속 언론기구는 군사독재의 하수인이자 방조자로서, 때로는 독재자를 만드는 권력기구로서의 역할을 당당하게 수행하였다.
이것이 바로 반독재 민주화운동인 4·19학생혁명을 정치민주화에로 이어가지 못하게 한 5·16 쿠데타 및 장기집권을 방조·선전하였고, 서민대중의 민주정치 회생노력을 잔인한 학살로 진압한 5·18의 신군부 횡포를 방조·은폐시킨 족벌 및 재벌 언론의 반민중적 진면목이었다.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언론인들이 성공한 것이 있다면 군부권력과 재벌 경영주의 당근술책에 영합한 임금인상 투쟁뿐이었다. 그리하여 언론종사자들은 일부 젊은 기자를 제외하고는 공동체에 대한 민주적 책임감이나 용기도 없이 권력과 자산가 편에 서서 펜대를 놀리는 비굴한 월급장이·출세주의자로 머물러 있게 되었다.


박 지 동 (광주대 언론대학원장, 동아투위 위원)


/ 언론노보 280호(2000. 5.3)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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