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베리타스>, 사장때문에 최대 위기


한국의 저명한 라디오 방송사인 기독교방송(CBS, Christian broadcasting systems)의 권호경(Kwon, Ho-kyeong) 사장이 자신의 자리 보전을 위해 끊임없이 정치권력에 굴신해오다 사내 외로부터 사퇴를 요구받고 있다. 권사장 사퇴를 둘러싼 논란은 한국에서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언론의 자유가 신장된 것은 사실이지만, 일부 언론인들이 아직도 자신의 출세를 위해 스스로 권력에 충성하던 과거의 행태를 벗어나지 못한데서 불거진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권호경 사장은 지난 94년 한국 교회의 주요 교단 대표들로 구성된 기독교방송 재단이사회에서 사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임기는 오는 2002년에 끝난다. 기독교방송은 1954년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민간방송으로 서울을 포함해 11개의 지역 네트워크를 가진 전국적인 방송사다. 필리핀의 마르코스 독재에 항거해 민주화를 일궈낸 방송 <베리타스>(진리)에 비유되는 한국판 양심의 소리며 과거 한국의 독재 정부와 투쟁을 벌여 80년부터 87년까지는 군사정권에 의해 보도기능이 정지되기도 했다. 87년 한국 국민들의 성원으로 양심과 민주의 소리로 사랑을 받았던 CBS의 보도기능이 회복돼 지금까지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방송으로 성장해 왔다.
그런데 권사장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석달 앞둔 2000년 1월 새천년 민주당의 신임 김옥두 사무총장에게 "축 총선 승리"라고 쓴 취임 축하 화분을 보냈다. 새천년 민주당은 한국의 집권여당이다. 이 화분은 한국의 유력한 신문인 한겨레신문에 사진과 함께 보도됐다. 한겨레신문은 "언론사 사장의 덕담 치곤..."이라는 사진 설명으로 사실상 추문으로 규정지었다. 권사장은 "이 화분의 문구를 직접 구상하고 작성을 지시했다"고 시인했다. 이에 대해 CBS 노동조합은 "자신의 입지가 취약해지자 집권 여당에게 잘 보이려다가 이 같은 추문이 빚어졌다"고 규정하고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 추문 이후 노동조합의 조사 결과 권사장은 지난 94년과 96년에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비밀 사신을 보내 대통령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지난 94년 보낸 사신에서는 "정부에 비판적인 프로그램을 폐지하고, 진행자를 교체했으며, 인사이동을 통해 김영삼 정부와 호흡을 같이 할 수 있는 진용으로 개편했다"고 밝혔다.
권사장은 그 뒤 정권이 바뀌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다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 것으로 밝혀졌다. 권 사장은 이 편지에서 김대중 정부의 방송 정책과 일치하는 내용, 즉 "시끄러운 음악은 제외시켰으며, 조용한 음악 프로와 남북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찾아 방송해 왔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권사장은 또 정부와 무관한 CBS의 99년 4월 파업 상황에 관해서도 "저의 부덕한 소치로 지난 한달 동안 방송을 파업하게 되어 대통령님께 심려를 끼쳐 드려서 송구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라고 자세히 '아뢰고', 사죄하고 있다. 최근 이 편지가 공개되자 대통령 비서실에서는 "권사장이 대통령을 짝사랑해서 빚어진 일일 뿐 청와대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비공식 논평을 하기도 했다.
노동조합은 일련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권 사장의 행위는 권력과 긴장 관계를 유지해야 할 언론사 사장으로서 해서는 절대 안 될 일"이라고 규정했다. 또한 "한국전쟁 이후 46년동안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이를 통해 국민의 신뢰를 쌓아온 기독교방송의 사장으로서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 CBS가 한국에서 의미 있는 언론기관으로 계속 존재하기 위해서는 권사장이 즉각 퇴진해야 하며, 권사장 퇴진을 요구하는 것은 CBS를 살리기 위한 운동이라는 것이 CBS 직원들의 주장이다. 노동조합은 이 때문에 사장 임면권을 가진 기독교방송 재단이사회에 사장의 퇴진을 공식 요청했으며, 이사회는 현재 권 사장의 사퇴 문제를 논의 중이나 권호경 사장은 사퇴를 거부하고 있다.
CBS 노동조합이 권 사장 퇴진을 요구한 뒤로 CBS의 노조원이 아닌 부국장과 부장급 중간 간부 28명이 사장 퇴진을 호소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을 발표한 28명은 보도와 편성 기술국 소속 간부 36명의 78%에 이른다. 그러나 권사장은 성명을 발표한 간부들에 대해 두달간의 정직과 석달간의 감봉이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이들 간부들은 현재 국가 노동위원회에 부당 징계에 대한 구제신청을 제기해 둔 상태이며, CBS 평직원 12명도 권호경 사장의 부적절한 정치적 처신으로 인해 CBS 직원으로서 심각한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며 법원에 위자료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러한 소송은 한국 언론 사상 처음 있는 일로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KFPU, KOREA FEDERATION OF PRESS UNIONS), 한국 기자협회(JOURNALISTS ASSOCIATION OF KOREA), 언론개혁시민연대(NGO) 등에서도 지지 성명을 잇따라 냈다.
또 한국의 기독교계 신문들은 물론 MBC와 중앙일보, 조선일보, 한겨레, 대한매일, 연합뉴스 등 전국적인 영향력을 가진 방송과 신문, 통신사에서 권사장의 부적절한 처신을 둘러싼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국제적으로도 파리에 본부를 둔 '국경 없는 기자단'(RSF)이 조사관을 서울로 파견해 현지 조사를 거친 뒤 CBS 직원들을 지지하는 성명을 4월 4일 발표했다. '국경없는 기자단(RSF)'의 로베르 메나 사무총장은 "CBS 기자와 PD들은 공정보도와 독립성을 위해 투쟁중이며 이를 적극 지지한다. 언론사주는 경영인 이전에 언론인임을 망각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국제언론인연맹(IFJ)의 AIDEN WHITE 사무총장도 4월 19일 서울에 있는 CBS를 직접 방문, CBS 기자협회장과 노조위원장, 권사장의 퇴진을 요구했다가 정직 등의 징계를 당한 CBS 간부들을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WHITE 사무총장은 "권호경 사장의 행동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로 전세계 언론인들과 함께 CBS 투쟁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WHITE 사무총장은 권호경 CBS 사장이 4월 29일부터 IPI 보스톤 총회에 참석하는 것과 관련해 "IPI 측에도 권사장의 부적절한 처신과 CBS 직원들의 투쟁을 이슈화하도록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우리는 언론자유를 표방하는 IPI가 회원으로 가입해 있는 CBS 권호경 사장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해주기를 바라며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첫째, IPI는 부적절한 정치적 처신과 언론인에 대한 부당 징계를 일삼은 CBS 권호경 사장의 즉각적인 사임을 촉구해 달라.
둘째, IPI는 IPI의 창립정신을 근본적으로 훼손한 권호경 사장의 회원 자격을 즉각 박탈해 달라.
셋째, IPI는 이번 CBS 사태를 계기로 언론 사주나 사장의 부적절한 처신이 언론 자유와 정의 실현에 얼마나 심각한 위협을 줄 수 있는지 자각하고 이를 배격하는 공식 성명을 발표해 달라.

2000.4. 29
CBS LABOR UNIONS (http://www.nojo.pe.kr)


/ 언론노보 280호(2000.5.3)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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