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노동자'를 넘어
우리들의 무지개가 뜰 때까지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 서울 한복판에서 스물 두 살의 꽃다운 젊음이 불길에 휩싸인다. 그 시각 서남해의 한 작은 섬에선 9살난 소년이 아무것도 모른 채 재잘거리고 있다.
시간은 흘러 80년대. 9살 짜리 소년은 큰학생이 돼 그 날 산화한 ‘어느 청년 노동자’의 짧은 죽음과 긴 삶을 만난다. 나이 스물이 넘도록 아무것도 몰랐던‘소년 대학생’은 이제야 비로소 자신이 딛고 있는 땅과 주변 사람들에 대해 조금씩 알기 시작한다. 뿌연 안개 속에서 드러나는 실상은, 이제까지 얼마나 좁은 틈으로 세상을 봐 왔는지를 실감케한다. 껍질이 깨져나가는 아픔이 한 동안 이어진다. 소년이 필자임을 벌써 눈치 채셨으리라.
나이 서른이 다 돼 한겨레에서 처음 시작한 사회생활. 벗어날 길 없는 노동자가 됐지만 아직은 임금 받아 살아가는 노동자라는 생각을 애써 하지 않으려 했다. 오너가 없고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주인이라는 생각을 하는 회사의 조건과 환경도 이런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어찌어찌 하다보니 노조 사무국장을 맡게 되면서 한겨레 노사관계의 껍데기와 알멩이를 보게 된다. ‘오너 없는 회사, 경영진도 책임 사원’, ‘노사관계는 경쟁적 협력관계’라는게 외피이고, 속을 들여다 보면 저임에서도 높은 생산성을 기대하는 ‘벗어날 길 없는 노사관계’임을 더욱 절감한다. 갈수록 경쟁사를 의식하고, 매출액을 생각하며 당연히 쉬어야 할 날도 줄여가고, 느는 지출항목과 비교하면 기는 수준인 임금인상. 그럼에도 경영진은 어려움을 헤아려 주지 않는다고 하고. 눈을 밖으로 돌려보면 빛좋은 언론노동자들이 개살구가 돼가고 있다. 과중한 일로 멀쩡했던 동지들이 드러눕고, 무서운 병명이 젊음을 앗아가려 넘보고 있다. 사주들은 한 해에만 수 백억씩 버는데도 성이 차지 않는지 ‘더해라 일 더해라 열심히만 하면 옆에 있는 동료 몫에서 떼내 더 주겠다’는 식으로 몰아친다. 언론노동자 식구들은 가족나들이를 언제했나 잊어버렸다. 주40시간 근로, 일을 통한 자아실현은 기사와 방송멘트 안에서만 자유롭다. 좁게는 한겨레, 넓히면 언론노동자들이 처한 이 현실을 어떻게 타개할까?
산별노조. 뜬금없다. 그러나 이놈의 기업별 노조 때문에 기를 못펴서 그렇지 우리 노조사에도 산별노조의 지울수 없는 기록이 분명히 있다. 1945년 11월 전국 각지에서 50만 조합원을 대표한 506명 대의원들이 참석해 결성한 전평이 있고, 60~70년대에도 위로부터 군사정권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산별노조 체계가 유지됐다. 다른 얘기 하나. 세계 노동운동사를 보면 지배계급은 노동자들이 산별노조로 뭉치는 걸 전혀 원치 않았다. 그럼에도 노동진영은 긴 시간, 수많은 희생을 감내하면서 산별노조를 만들어 정착시켜 왔다. 멀리갈 것 없이 최근 국내의 노동운동도 산별노조 건설이 주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산별노조 건설은 그 자체가 선이며 꼭 해내야할 당위로 생각하면 어떨까? 언론노동운동도 산별노조전환을 시작으로 언론노동운동사를 새로써야 한다. 다들 보셨겠지만 38명의 수배자들이 산별노조의 씨앗이 되겠다고 감히 나섰다. 씨앗이 시원치 않아도 밭이 좋으면 틀림없이 싹을 틔우고 실한 열매를 맺는 법. 언노련 전 조합원들이 산별노조의 밭이다. 그럼, 산별노조가 되면 언론현실의 실타레가 풀리고 언론노동자들 삶에 무지개가 뜰까. 당장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딱 하나 크게 달라져야만 할게 있다. ○○일보 조합원, ○○○방송 조합원 이라는 의식을 하루 빨리 털어버리고 전국언론노조 조합원이라는 생각을 무의식중에도 지녀야 한다. 그제서야 진짜 장정이 시작될 것이다.


한겨레노조위원장 이정구


/ 언론노보 281호(2000.5.17)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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