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벽에 매달려 용변 보면서 인간의 한계 깨달아

취재기자로 세계 첫 에베레스트 등정 광주매일 박헌주 기자


광주매일 박헌주기자(33·지역사회팀)가 지난 5월15일 세계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 정상에 뉴밀레니엄 최초로 태극기를 꽂고 돌아왔다. 그는 취재기자로는 세계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기록도 갖게됐다. 93년 이후 3번째 도전만에 지구 제3의 극지에 발자국을 남긴 박기자로부터 등반의 소회를 들어본다. 〈편집자주〉

히말라야등반을 떠난다는 말을 듣고 후배여기자가 왜 가는지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단다. 더구나 8월 첫아이를 출산할 예정인 부인을 두고 어떻게 사지로 갈 수 있느냐고. 너무 이기적이지 않느냐는 투였다. 사실 맞는 말이다. 나에게도 임신한 아내를 두고 가는 것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에베레스트는 내 젊음의, 인생의 화두이자 풀지 않으면 안되는 숙제라는 말로 대신했다.
93년 대학을 졸업하던 해 나는 에베레스트에 처음 도전장을 냈다. 그러나 3차례나 정상을 공격했으나 폭풍 속에 휘말려 8천1백m에서 후퇴해야했다. 광주매일에 입사한 후인 지난 96년 조선대개교 50주년과 광주매일 창사 5주년 기념 에베레스트원정에 취재기자로 참가했다가 또다시 7천7백m지점에서 눈물을 삼켜야했다.
이번 원정은 문화관광부가 새천년기획으로 후원해 대한산악연맹이 1주일간의 동계훈련을 통해 7명의 대원을 선발, 꾸려졌다. 회사에서는 원정취지와 나의 의지를 확인한 뒤 흔쾌히 출장처리를 해줬다. 이번이 삼고초려인 셈이다.
등반은 험난했다. 캠프2(6,400m)이상은 영하 20도를 밑도는 혹한과 강풍이 휘몰아쳐 텐트가 박살났다. 마침내 5월6일 1차 공격조로 선발된 나는 정상으로 향했다. 그러나 8천2백미터 지점에서 탈진과 호흡곤란으로 또다시 패퇴했다. 도전이라는 괴물이 탈진한 몸을 계속 정상으로 밀어올렸지만 아내와 아기의 얼굴이 나를 끌어내렸다. ‘살아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느냐’고 안타깝게 손을 벌린 것이다.
다른 대원이 감행한 2차 공격과 3차 공격도 폭풍과 루트공략실패로 인해 실패로 돌아가고 마지막 4차 공격 기회가 또다시 나에게 주어졌다.
‘죽음의 지대’라는 캠프4(8,050m)에서 미숫가루로 저녁을 대신하고 16일 새벽 0시 30분 후배인 모상현 대원(27)과 함께 정상으로 향했다. 강풍과 눈보라로 산소마스크에는 고드름이 얼고 우모복은 꽁꽁 얼어붙었다. 강풍 속을 뚫고 설벽과 암벽을 등반, 전위봉인 남봉(8,700m)에 올랐다. 그곳에서 정상까지는 칼날능선이어서 보기만 해도 아찔했다. 자칫 미끄러지거나 발을 헛딛으면 곧장 3천m아래로 추락한다. 칼날능선을 살얼음판 걷듯 오르다 마지막 고비인 8m 높이의 암벽에서 위기를 맞았다. 암벽의 틈새에 아이젠을 찬 등산화가 끼어버려 꼼짝할 수 없게됐다. 5m 로프에 체중을 맡기고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고도 8천8백m에서 가느다란 줄에 목숨을 의지하고 허공에 매달리는 심정. 자칫 로프가 암각에 찢기거나 낙빙에 끊어진다면 끝없는 절벽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간신히 신발을 빼내고 눈처마를 20분 정도 지나 나는 오전 10시50분 한평 남짓한 정상을 밟았다. 정상직전 5분전부터는 인생의 파노라마가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산에서 숨진 선후배들과 가족들의 얼굴이 스치며 목이 매였다. 3번째 도전만에 정상을 허락한 여신에게 감사하며 1시간 10분간 정상에 머물렀다. 7년 만에 해냈다는 가슴벅참과 함께 허탈감도 밀려왔다.
등반기간 내내 ‘산에 왜왔는가’라는 질문이 나를 괴롭혔다. 로프에 매달려 용변을 봐야하는 빙벽을 오르면서, 희박한 산소로 가슴을 찢어버리고 싶은 고산병을 체험하면서, 곧 붕괴될 것같은 얼음기둥 밑을 지나면서. 나는 말한다. ‘나는 모험을 하거나 영웅이 되기 위해 산에 온 것이 아니다. 공포와 두려움을 통해 나는 세상을 알고싶다. 두려움과 고독을 이겨낸 뒤의 세상은 모든 것이 새롭다. 나는 지금 베란다의 화초를 보며 매일 잎을 맞출 정도로 살아있음에 경배한다. 코로 숨쉴 수 있고 두발을 마음놓고 딛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아름답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면서.


/ 언론노보 283호(2000.6.14)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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