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은 자본·보수 권력 대항하는

언론노동자 '인간선언'

나무만 보는 자사이기적 기업별노조 한계직면

단위노조 총연대-우렁찬 숲 일구는 의식필요

"이대로가면 깨진다" 총투표 거쳐 힘찬 출범



언론노련 산별추진위 조직일을 맡다보니 많은 사람들을 만나 얘기하고 토론하며 또한 술을 마십니다. 노동조합 이야기 말고는 주식이니 벤처, 인터넷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두어 달 전까지만 해도 H사 노조위원장으로써 '최고의 노조위원장'이었던 신 선배도 지금은 완전히 인테넷 전도사가 돼버렸습니다. 노조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지만 말입니다. 뿐입니까. 벤처나 주식으로 수십 수백억을 벌었다는 기사가 일간지의 경제면을 수놓고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가끔은 멍해집니다. 이러다가 나만 뒤쳐지는 건 아닌 지. 세상 흐름에서 자꾸 밀려나고 있다는 생각말입니다. 노동조합이니 산별노조니 이런 고리타분한 주제를 부여잡고 악악대야 하는지 화도 나고요.
그렇지만 노동조합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노조가 별로 하는 일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정말 결정적일 때는 자기가 낸 조합비의 수십 배 역할을 하지요. 그런 점에서 IMF는 반면의 교사였습니다. 또한 노조는 힘이 세야 합니다. 지난 98년 중앙일간지 중 H사가 가장 힘들었지만 회사는 한 명도 정리해고 못했습니다. 노조가 셌기 때문입니다. 언론사노조를 산별노조로 재편하고자 하는 이유는 '노동조합을 계속 유지하고 노조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인터넷이나 벤처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2002년 전임자임금 미지급 문제
2002년부터는 노조전임자의 임금을 회사에서 지급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문제 중에서는 이것이 가장 시급한 사안입니다. 지금처럼 노조 전임자를 유지하자면 조합비로 전임자 월급 주고 나면 조합비는 남지 않습니다. 아니 월급에도 모자랄 것입니다. 오백 명 미만의 노조는 전임자 한두 명으로 근근히 버텨야 할 텐데 그 결과 노조의 활동력이나 힘은 현저히 떨어질 것입니다. 말 그대로 이름만의 노조로 전락해버리고 맙니다. 이것은 정도의 차이지 큰 노조도 마찬가집니다.
일부 조합원들은 정부안대로 노사자율로 결정되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노조 요구안 다 들어줄 테니 전임자 없애자'라거나 '전임비 줄 테니 요구안에서 5%만 깍자'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대로 가면 5년 후에 살아남을 노조는 회사의 노무관리기구나 어용노조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기 이익만 챙기는 기업별노조
지난 십여 년 간 한국의 노조운동은 남아공, 브라질과 함께 세계 최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엄청난 투쟁을 전개했음에도 그에 값하는 성과는 미약했습니다. EU회원국 열 다섯 나라 중 열 세 나라에서 진보정당이 집권하고 있고 남아공이 ANC가 집권하고 있는 바 그것은 노동조합의 힘이 크게 작용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우리는 전국을 뒤흔든 파업을 벌여도 그 성과는 해당 기업의 조합원들에게만 돌아갑니다. 그것도 아주 조금 말입니다. 이것은 기업별노조라는 조직체계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기업별노조는 특정 기업의 정규직 종사자만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입니다. 당연히 기업별노조는 해당 기업의 정규직 조합원들만의 이익을 우선하게 됩니다. 기업의 벽을 넘어 전체 노동자의 이해가 걸린 사안, 예를 들어 조세개혁의 문제나 사회복지의 문제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은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전체의 이익이 보장될 때 나의 이익도 보장되는데 기업별노조는 이런 의식을 처음부터 없애고 있습니다. 일본은 부자지만 국민은 가난하다는 말도 기업별노조에서 비롯된 측면이 큽니다. 산별노조가 발달된 유럽과 기업별노조로 남아 있는 일본을 비교해 보십시오.

열 명 중 한 명만 조합원
피부에 와 닿지는 않지만 한국의 노조운동이 빈사 상태에 접어들었다는 핵심적인 징표는 조직률 급락에 있습니다. 노조 조직률은 1989년 18.6%를 최고로 1994년 14.5%, 1999년에는 11%로 떨어졌습니다. 이는 스웨덴의 91.1%, 덴마크의 80.1%, 영국의 32.9%, 일본의 24%와 비교하면 그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노조의 힘은 그 쪽수에서 나온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천 삼백만의 노동자 중 백 사십만이 조합원이고 이마저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으로 나뉘고 5천 5백개의 기업별노조로 흩어져 있는 현실, 한국 노조운동의 실력은 여기서 더하고 뺄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300인 이상 사업장은 68.4%, 500인 이상 사업체는 81.2%가 조직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결국 조직률을 끌어 올리는 문제는 중소사업장을 어떻게 조직하느냐에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이들을 누가 조직합니까. 기업내의 문제에만 고민하고 있는 기업별노조가 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총연합단체나 산별연맹의 제한된 인력으로 가능합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노사관계 급변
IMF 이후 한국의 노사관계는 급변하고 있습니다. 연봉제, 분사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고 스톡옵션을 경쟁적으로 도입하고 있습니다. 연공서열을 고수하는 기업에서조차 성과급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예전의 시스템을 고집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노동문제의 성격 또한 실업과 고용, 사회복지, 직업훈련과 재교육, 조세개혁 등이 주요한 문제로 부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안들은 기업단위의 노조로는 싸우기도 힘들 뿐 아니라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입니다. 자본은 빛의 속도로 변하고 있는데 노동은 거의 움직이지 않습니다. 기업단위의 노조를 고집할 경우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한 번만 생각하면 그 답은 자명합니다.
산별노조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써 추진되고 있습니다.

노동조합의 구조조정
비록 조직률이 11%에 불과하지만 한국의 노동조합이 가진 자원은 적지 않습니다. 6천명이 넘는 전임 인력과 2천억이 넘는 연 예산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 방대한 인적 물적 자원은 5천 5백개의 기업별노조로 모래알처럼 흩어져 잠자고 있습니다. 6천명의 전임 인력, 엄청납니다. 독일 금속노조의 조합원은 277만명이고 전임자는 2천 5백명입니다. 한국의 노조는 140만명을 6천명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연 예산 2천억, 적지 않습니다. 이 중 20%를 아껴 노조에 우호적인 정치인들을 후원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정리해고니 전임자임금 문제가 지금처럼 결론났겠습니까. 노동자들이 낸 조합비는 진짜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해 쓰여져야 합니다. 행사성 경비나 먹고 마시는 데 쓰여지기보다는 사회복지의 확충이나 조세개혁을 위해 투입되는 게 조합비 제대로 쓰는 것입니다.
인적 물적 자산의 중앙집중과 효율성 제고, 산별노조로 가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노동조합의 지속과 발전
산별노조로 가는 두 번째 이유는 노동조합을 계속 유지하고 힘을 배가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전임자임금 문제가 해결되지 않더라도 산별노조로 전환하면 최소한 노조의 존립근거는 확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업별노조가 가지고 있는 낭비적이고 비효율적인 체계를 극복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산별노조 중앙은 변호사, 노무사, 회계사, 세무사 등 전문 인력을 채용하고 단위 사업장에서 훈련된 다수의 전임인력을 확보함으로써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능력과 실력을 갖추게 됩니다. 사업장 단위의 노조가 해야 할 일은 현저히 줄어듭니다. 이 속에서 노동조합 운동의 발전은 담보됩니다. 산업 차원의 실질적인 정책 대안을 제시하고 정부와도 대등하게 협상할 수 있게 됩니다. 먼 나라 얘기같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우리도 가까이 와 있습니다.

노사정 모두에 유리
한국의 5천 5백개 기업별노조는 매년 임금협상을 하고 2년에 한번 단체협약을 진행합니다. 기업 단위의 노조는 모두 여기에 집중합니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기업별 교섭 구조 아래 한국의 노사는 매년 천 7백억에 이르는 교섭비용을 지불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기업의 경영자원과 노조의 운동자원을 비생산적으로 소모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산별교섭은 교섭일수와, 교섭위원 수, 교섭비용 등 모든 측면에서 효율성을 제고할 수 있습니다. 노와 사는 물론 국가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됩니다.
오랫동안 독일이 고급승용차나 최고급 기계공구 분야에서 비교우위를 가졌던 것은 산별노조가 조기에 정착됨으로써 가능했습니다. 산별교섭을 통해 최저임금을 제시하고 임금인하를 억제함으로써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고부가가치산업으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하는 기능을 했던 것입니다.
언론노련은 올 5월 중순부터 순차적으로 노조별 조직변경 투표에 들어갑니다. 물론 산별노조로 전환하기 위한 조합원 투표입니다. 그리고 9월 22일 전국언론미디어노조(가칭)가 출범합니다. 이를 위해 연맹은 단위노조별 순회간담회와 교육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고 간부수련회를 통해 산별노조의 규약과 상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조직전환에 따른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연맹은 규약을 단계적으로 바꾸어나갈 예정입니다. 당장은 크게 바뀌는 게 없습니다. 연맹으로 올라가던 조합비가 조금 늘어나고 중앙노조의 전문 인력 충원이 가능해집니다. 그러므로 이 과정은 제대로 된 산별노조를 만들기 위한 첫걸음인 셈입니다.
그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할 산별노조를 위해 우리 조합원들이 앞장서주십시오.

-박강호 언론노련 산별추진위 조직위원장


<277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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