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북취재중 느낀 분단의 안타까움

방북기간 함께한 북한안내원 잊지 못해


13일 오전 6시, 숙소인 고려호텔을 출발해 7시에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방북취재단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는 첫날, 모두들 8시경부터 분주히 준비를 시작하며 첫 화면을 전송하기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드디어 오전 10시 30분경, 김대중대통령 특별기가 공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경호진과 북측 행사준비팀은 물론, 우리 취재진들도 팽팽한 긴장 속에 놓여졌다.
트랩을 내려오는 김대통령과 이를 마중나온 김정일 국방위원장, 환호하는 북한주민들로 화면은 가득찼고, 나는 '대통령을 환영하는 북한주민들을 촬영한 첫 한국인'이 됐다.
그러나, 내가 지금 쓰고 싶은 것은 그 순안공항에서의 첫화면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이야기다.
북한에서 만난 한 안내원.
아마 아주 오랫동안 그를 잊기 어려울 것 같다.
깐깐한 외모를 가진 32살(나와 동갑나기)의 청년인 그는 나를 처음 보자마자 "심선생 대화 좀 합시다"라며 강하게 나를 잡아 끌었다. 그 깐깐한 감시원은 그 후에도 선생은 방송하러 온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둥, 다른 사람에 비해 점쟎다는 둥, 하며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틀 후, 일과시간이 끝나고 나와 내 안내원 그리고 SNG를 운용하는 한국통신의 온대리와 그의 안내원과 함께 포켓볼을 치게 되었다. 당구를 처음 접해보는 안내원의 손가락을 만져 모양을 잡아주며, 경기를 하였다. 처음으로 서로 의심하지 않고 서로 의지하며 그 느낌을 나누었던 시간, 드디어 그의 의심에 찬 마음이 풀어짐을 느꼈다.
판문점을 통해 서울로 돌아오는 길. 서흥 찻집에서 우린 함께 사진을 찍었고, 나는 그에게 물었다. "김선생, 부모님들 좋아하시는거 뭐 있어" 하자 그는 나를 쳐다보며 "말이라도 고맙네"라고 하였다. 나는 다시 물었다. "벌꿀이라도 한 병 사주고 싶다" "일 없어"(북한에서 일없다는 말은 괜챦다는 뜻) "왜 들고 가기 곤란해서 그래"하고 묻자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떡이었다. 나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판문점에서 악수하고 헤어지며 건강하게 잘 있으란 말을 하였다. 다시 만날 일이 있기를 바란다는 말과 함께. 세계화 시대에 이젠 그 어느 곳도 연락이 안 닿는 곳이 없건만 같은 땅덩어리에 살면서 전화로 혹은 편지로 안부를 물을 수도 없다. 마치 우리가 다다를 수 없는, 반드시 블랙홀을 통과해야만 갈 수 있는 시간의 차원을 뛰어넘는 우주 반대편의 세상을 다녀온 기분이다.

KBS 영상제작국 심청용


/ 언론노보 284호(2000.6.29.)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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