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다 마사아키의 <전쟁과 인간>
태평양 전쟁 참가 군인의 고백

"나는 왜 미치자 않았는가"
푸른 군복으로 가릴 수 없는
인간의 얼굴에 관한 진솔한 기록


고엽제후유의증전우회 회원들이 한겨레신문사에 들이닥쳐 기물을 마구 부수고 불을 지르던 지난 6월 27일. 사무실에서 밖을 내려다 보니 정글복을 입은 수백명의 시위 군중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본 푸른 군복의 물결에선 위압감까지 느껴졌다. 그날 나는 시위 군중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시위 군중의 두 얼굴을 보았다. 멀리서 푸른 군복의 물결 속에 휩싸여 있을 때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안겨줄만큼 충분히 강인해 보였다. 그러나 그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얼굴 하나하나를 찬찬히 뜯어봤을 때, 그들은 그냥 평범한 이웃사람의 얼굴이었다. 택시 기사 아저씨 같기도 하고, 복덕방 아저씨 같기도 한.
전쟁도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전쟁의 얼굴은 악마의 그것이다. 죽이고 파괴하고 학살하는. 그러나 거기 끌려가 적을 향해 총부리를 겨눠야 하는 한사람 한사람은 모두 평범한 이웃의 얼굴일 뿐이다. 역사는 푸른 군복의 물결을 기록하지만, 때로 우린 그 군복으로도 가릴 수 없는 인간의 얼굴을 보아야 할 때가 있다. 나는 최근 푸른 군복으로 가릴 수 없는 인간의 얼굴에 관한 매우 진솔한 기록을 하나 읽었다.
"어느 날 참수형에 입회했을 때, 목이 제대로 잘리지 않은 한 명이 파놓은 구덩이에 떨어져 피투성이인 채로 '리번 꿰이즈!'(日本鬼子, 일본 살인마)라고 소리쳤다. 헌병은 그를 권총으로 쏜 뒤 '군의관님, 사망 확인을 해 주십시오' 했다. 구덩이 속에는 중국인 일곱 명의 몸과 머리가 뒤섞여 있었다. 그 속으로 내려갈 때 오가와 씨는 '나는 왜 미치지 않는 것일까' 의아스러웠다."
일본 정신분석 전문의 노다 마사아키의 <전쟁과 인간>(도서출판 길 펴냄, 원제는 '戰爭と罪責')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이 책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동원됐던 일본군 병사, 헌병, 장교, 군의관들 가운데 죄의식을 느끼고 고백해온 이들에 대한 기록이다. 지은이는 지난날의 전쟁범죄에 대해 얘기하면 '자학사관'이라는 비난을 퍼붓는 일본 사회의 경직성과 정신적 가난함이 어디서 왔는지를 추적하기 위해, 지난 93년부터 죄를 자각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청취해왔다. 그는 일본 사회가 '죄의식을 억압해온 사회'라고 말한다. 그 뿌리는 적어도 중일전쟁을 저지른 군국주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군부는 전쟁에 동원된 앳된 병사들로 하여금 총검으로 중국인 포로를 찔러 죽이도록 강요하고, 군도로 목을 치도록 명령했다. 이런 끔찍한 경험을 강요당한 이들은 정신에 깊은 상처를 입는다. 그럼에도 일본 군부는 이를 무시하고 '강인한 군인정신'만을 강요했다. 지은이는 이를 '마음을 무시하는 정신주의'라고 부른다.
"죄를 죄로 자각하고, 학살당한 이의 편에 서서 상처를 아파하고 눈물흘릴 줄 아는 '여린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는 게 지은이의 결론이다. 군국주의자들은 이를 '자학사관'이나 '연약한 감상주의'라고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어떤 사회가 살기 좋은 사회일까. 사람을 죽이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강인한' 사람들만 우글대는 사회는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 언론노보 286호(2000.7.26) 4면

저작권자 © 전국언론노동조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