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의 악마들』

피터 홉커크 지음, 김영종 옮김, 사계절 펴냄


1980년대 중반 일본 NHK의 실크로드 문화유적 답사 프로그램이 국내에 방영된 적이 있다. 그 인기는 대단했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 역시 '우리도 저런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면' 하고 부러워했었으니까.
역사나 문화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가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 잡혔을 법한 곳,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 끝없는 펼쳐지는 사막, 거기 감춰진 인류 문명의 위대한 흔적들. 실크로드는 그래서 환상과 신비로움으로 다가오곤 한다.
영국의 프리랜서 저술가인 피터 홉커크가 쓴 『실크로드의 악마들』은 실크로드 탐험 발굴사다. 시대는 20세기초. 영국의 오렐 스타인, 스웨덴의 스벤 헤딘, 독일의 폰 르콕, 프랑스의 폴 펠리오, 미국의 랭던 워너, 일본의 오타니 고즈이 등 고고학자 혹은 탐험가 6인의 실크로드 탐험 발굴 과정을 다큐멘터리식으로 정리해놓았다.
그런데 책 제목에 들어간 '악마'라는 단어가 우선 눈길을 끈다. 악마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엄밀히 보자면, 이들의 실크로드 탐험과 발굴이 실은 약탈이었다는 말이다. 약탈을 한 사람들이니 악마일 수밖에.
영국의 지리학자이자 발굴탐험가인 오렐 스타인의 경우. 그는 1907년 중국 돈황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돈황 천불동(千佛洞)에 엄청난 양의 고문서가 숨겨져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천불동은 400개가 넘는 석굴사원과 벽화 조각상 등이 가득한 고대문화의 보고. 스타인은 곧바로 천불동으로 향했다. 하지만 고문서가 보관돼있는 17호 석굴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스타인은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문을 열어 달라고 며칠 동안 관리인을 설득했다. 관리인이 꿈쩍도 하지 않자 스타인은 돈으로 그를 회유했다. 돈에 넘어간 관리인은 끝내 900년 넘게 굳게 닫혀있던 17호 석굴의 문을 열었다.
스타인은 불경 등 각종 고문서를 동굴 밖으로 들어내기 시작했다. 그 양은 수십상자에 달했다. 그 귀중한 문화재들은 아무런 제지 없이 런던으로 옮겨졌다. 중국의 허가도 없이 무단으로 반출한 것이다. 그것은 탐험이 아니었다. 탐험을 빙자한 문화재 약탈, 고고학적 침략이었다. 스타인뿐만 아니라 이 책에 등장하는 나머지 다섯명 모두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었다. 양심의 가책은 커녕 마치 자신들이 인류의 문화유산을 잘 보존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영국에서 스타인을 '어떤 고고학자보다 가장 대담하고 모험적으로 고대세계를 공략했던 경이로운 인물’로 평가해왔다는 사실이 그 대표적인 예다. 실크로드를 보는 그동안의 시선이 강대국 중심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쯤해서,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에 관한 놀라운 얘기 하나를 털어 놓아야겠다. 중앙박물관엔 실크로드 유물 1700여점이 소장되어 있다. 어떻게 우리에게도 실크로드 유물이 있을까, 의아해할 것이다. 사정은 이러하다. 바로 이 책에 나오는 일본인 오타니가 발굴해 온, 아니 약탈해 온 유물들이다. 당시 조선총독부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신)에 보관했었고 광복이 되면서 우리가 인계받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우리의 문화재도 많이 약탈되었지만 우리 박물관에 외국의 약탈문화재가 있다는 사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할까.
『실크로드의 악마들』은 기본적으로 탐험 이야기다. 그래서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이 책의 빼놓을 수 없는 덕목은 역사를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 재미있으면서도 진지한 책이다.

-이광표(李光杓)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 언론노보 288호(2000.8.24.)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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