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래 다 늙어가지고 북에 가서 할일이 뭐가 있갔어. 그쪽 사람들에게 광주에서 지냈던 이야기 하면서 서로 같은 동포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일밖에…}
9월 2일이면 북으로 돌아갈 비전향장기수들의 마음은 기쁨과 아쉬움이 교차한다. 얼마 안 있으면 혈육이 살고 있는 북한의 고향 산천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지만 [제 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광주를 떠나는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는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분단이 낳은 또다른 비극인 비전향장기수. 6·25 뒷끝의 빨치산 출신이거나 남파 간첩이었던 이들은 글자 그대로 [사상의 개조]를 거부한채 골수 사회주의자로 남아 소외를 감수하며 살아왔다.
전향서 한장 쓰는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느냐마는 이들은 정신영역의 사상을 강제로 바꾼다는 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가 없었다고 한다.
[변절]을 거부한채 빛고을 광주에 정착한 [이단아]들은 6명으로 모두 북송신청을 해놓아 북한으로 돌아가게 된다.
가장 먼저 광주에 둥지를 튼 김영태씨(70·광주시 동구 산수2동)는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 호위병 출신으로 35년간의 감방생활끝에 지난 89년 출소한뒤 94년부터 탕제원을 운영하며 살고 있다.
평북 정주가 고향인 김씨는 {일생의 소망이 이뤄진다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그동안 남쪽에서 겪었던 일들이 영화필름처럼 스쳐지나간다}고 말하고 있다.
김씨외에 나머지 장기수들은 지역 재야에서 십시일반으로 모아 마련해준 광주시 북구 두암동 [통일의 집]에서 지난해 2월 수십년간의 영어생활에서 벗어난 후부터 거주중이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비전향]과 [통일]이라는 단어가 웬지 어울릴것 같지 않지만 통일의 집은 어느새 분단조국이 안겨준 아픈 상처의 한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현재 통일의 집에는 김동기(69), 리공순(67), 리경찬(66), 리재룡(57)씨가 생활하고 있으며 김인서씨(75)는 뇌출혈로 광주기독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고 있다.

거동이 불편한 인서씨를 제외한 4명의 사상범들의 요즘 하루는 고향으로 떠날 준비를 하느라 광주에서 자신을 보살펴준 지인들과 이별연습을 하느라 몹시 분주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들은 한결같이 북에 가서 [통일의 전령사]가 되겠다는 소망을 나타내고 있다.
{북으로 가게됐다는 소식을 듣고 전국에서 실향민들이 북의 가족에게 소식을 전해달라고 연락을 합니다. 죽을때까지 남북이 서로 이해하고 도울수 있도록 노력하는게 보은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평남 덕천 출신으로 그동안의 생활상을 적은 [새는 앉는 곳마다 깃을 남긴다] 라는 수필집을 내 화제가 되기도 했던 동기씨는 자신이 통일로 가는 한 징검다리가 되겠다는 신념을 뚜렷하게 밝혔다.
동기씨는 온겨례를 울렸던 8·15 이산가족 상봉이 마치 자신의 모습같아 애써 TV를 외면했다고 한다.
인상만큼이나 무뚝뚝한 공순씨도 {그동안 미운정, 고운정 다 들었는데 막상 헤어진다니 눈물이 앞선다. 과거처럼 이데올로기에 치우쳐 살기보다는 민족이라는 큰 틀속에서 남북한의 화해를 위해 살아야 겠지}라고 특유의 강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사상은 달라도 [인간]이라는 공통점은 같은 것 일까. 통일을 말하는 강인한 표정과는 달리 금세 진한 아쉬움이 고향길을 준비하는 노인들에게서 베어나왔다.
재룡씨는 {가지 말고 같이 살자고 하는 이들과 헤어져야 한다니 벌써부터 눈물이 나오네…}라면서 어느새 말끝이 흐려졌다.
지금도 눈에 밟히는 가족과의 수십년전 이별에 이은 또 한번의 헤어짐이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귀향가방은 남도의 정을 느끼게 하는 물건들로 채워지고 있다.
이곳에서 정든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한 무등산과 한라산, 해남 땅끝마을의 흙한줌, 생활하면서 직접 찍은 비디오테이프, 남도 산하를 그린 수묵화, 정든 이들이 건넨 이별의 선물 등….
역시 정이란 붙이기 보단 떼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그러나 비전향 장기수들은 살아있으면 언젠가는 그리운 남도 광주땅을 다시 밟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날은 민족의 염원인 통일이 이뤄지고 난 후의 일일 것이다. 민족통일의 달성으로 [통일의 집]이 분단의 상징이 아닌 통일의 기념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앞으로 며칠후면 이별과 재회를 동시에 맞이해야 비전향 장기수들에게는 광주의 하루가 너무나도 짧을 수 밖에 없다.

호남신문 여한구 기자


/ 언론노보 288호(2000.8.24.)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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