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개 언론노조가 1개로 통합

한국 노조 5천5백개 연간 교섭비용 수천억 낭비

2002년 노동환경 악화 기업별 노조 위기감 확산

보건, 금융 이어 언론, 금속 등 속속 조직전환 가세

언론 산별 8천5백 합류, 과반수 넘어 출범 순항


1. 현실로 다가온 언론산별
(가칭)전국언론미디어노조의 출범이 눈앞에 다가왔다. 언론노련은 예정대로라면 9월 22일, 늦어지더라도 11월 26일까지는 산별노조를 출범시킬 예정이다. 8월 23일 현재 KBS노조, 한겨레신문노조, 대한매일노조, 연합뉴스노조, 부산일보노조, 한국일보노조, KH내외경제노조 등 언론노련 산하 노조 중 핵심 사업장 17곳, 조합원 9천여명이 산별노조로의 조직전환을 위한 투표를 마쳤다. 곧이어 8월 말 9월 초에는 문화일보노조, 국제신문노조, 교육방송노조, 전남일보노조 등 20여 노조 4천여명의 조합원이 산별 투표를 예정하고 있다. 특별한 사정이 있는 몇몇 노조를 제외하면 출범 때까지는 90% 이상의 노조와 조합원이 산별노조에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지난 95년 방송단일노조 추진에서부터 시작된 언론노련의 산별노조 건설 작업이 막바지 단계에 접어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언론노련의 산별노조 추진은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언론사간의 치열한 경쟁, 자사 이기주의, 팽배한 개인주의 등으로 빈사상태에 빠진 언론사노조, 공동투쟁의 경험이 거의 전무한 조합원들을 단일한 산별노조로 편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얘기였다. '언론산별! 내 손에 장을 지지마'던 간부도 있었으니 오죽했으랴. 그러나 언론산별은 드디어 현실이 되고 있다. 언론산별을 추진한 산별추진위원회의 한 당사자로서는 감개무량하고 들떠있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산별노조는 노동계 전체의 숙원이다. 보건의료산업노조가 98년 2월, 금융산업노조가 2000년 3월 산별노조로의 조직 전환을 끝냈고, 언론과 금속이 각각 올 9월, 11월 출범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공공, 화학 등 그 밖의 산별 연맹들도 산별노조로의 조직 전환을 예정하고 있거나 서두르고 있다. 허다한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의 기업별노조에게 산별노조는 대안이자 대세로 분명히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2. 왜 산별인가
1) 노동조합의 조직형태
산별노조는 기업별노조의 대안인가. 어느 정도 그렇다. 지난 7월 금융산업노조의 파업에서도 보았듯 산별노조는 교섭과 쟁의, 정책 능력의 면에서 고도의 집중성과 파괴력을 발휘한다. 이는 기업별노조로 분산돼 있던 인적 물적 자원이 중앙으로 집중되면서 가능해짐은 물론이다. 그러나 산별노조가 기업별노조의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닌 것이다. 조직형태가 어떠하든 노조에게 일차적인 것은 조합원들의 유대와 단결력이며 이를 지속하기 위한 조직, 교육 등 일상활동이 중요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노동조합은 조직화 방식에 따라 직종별노조(craft union), 산업별노조(industrial union), 일반노조(general union), 기업별노조(company union)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직종별노조는 산업화 초기 단계에 나타난 조직형태로 특정 직종의 숙련공만을 대상으로 한 노동조합이었다. 따라서 배타적이고 폐쇄적이었다. 19세기 말부터 독점이 진전되고 기계제생산이 확대되면서 반숙련 미숙련 여성노동자가 급속히 증가하였다. 그러나 직종별노조는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의 배타적 기득권만 추구함으로써 노조로써의 기능과 힘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여기서 나타난 노조가 산업별노조이다. 산업별노조는 특정 직종, 직업, 숙련 수준에 관계없이 특정 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노동자를 조직하는 노동조합이다. 직종별노조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나타난 조직형태가 산별노조이므로 산별노조는 가입자격에 제한이 없다. 기업, 직종, 고용형태의 차이에 상관없이 일정 산업의 모든 노동자를 조직대상으로 한다. 산별노조의 등장으로 노동조건이 기업별로 큰 차이를 보인다든지, 거대 기업노조가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함으로써 기업내화하게 된다든지, 영세한 중소규모노조는 조직을 재생산하기 어렵다든지 하는 문제들에 대해 노동조합이 대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직적 기반을 갖추게 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산별노조는 유럽의 일반적인 노조 조직형태로 자리잡았다.
일반노조는 '직업별 산업별로 충원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는 노동조합'을 말한다. 일반노조는 필요에 따라 조직형태를 편리하게 만들어온 현실주의적 경향이 강한 영국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노조는 노동자를 폭넓게 조직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직업별 산업별 동질성이 없거나 희박해서 조합원간 결속력이 강하게 나타나기 힘들고 교섭상대방이 불분명하다는 단점을 갖고 있다.
기업별노조는 '특정 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를 조직대상으로 하는 노동조합'이다. 직종별노조, 산업별노조, 일반노조가 모두 기업 밖에서 기업과는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거나 조직하는 데 비해 기업별노조는 해당 기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기업별노조는 전세계적으로 한국과 일본에 특징적으로 존재하고 미국과 일부 동남아 국가에 부분적으로 기업별노조가 있다.
그밖에 지역노조, 그룹별노조, 원청 하청노조 등이 있으나 특수한 경우이고 노조의 일반적인 조직형태는 아니다.
2) 기업별노조의 한계
'특정 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를 조직하는 노동조합', 기업별노조의 모든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회사가 존재해야 노조도 존재하므로 해당 노조 조합원들은 기업별 의식, 혹은 종업원 의식에 젖어들 수밖에 없다. 산업별노조나 직능별노조도 종업원 의식은 있으나 기업별노조의 그것과는 비할 바가 못된다. 기업별 의식은 노동자들의 이해와 관심을 회사 안으로 국한하게 함으로써 전체 노동자간 연대나 단결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교섭에서도 기업별 교섭이므로 대규모 노조와 중소영세 노조간의 격차,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격차는 시간이 흐를수록 커지게 된다.
지난 십여년 간 한국의 노동운동은 대규모 사업장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이었다. 대규모 사업장 정규직 노동조합은 자신들의 급여가 올라가고 근무조건이 나아지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간간이 하청노동자들을 얘기하고 연대를 말했지만 그것은 체면치레였다. 그들에게 중소 영세사업장의 문제나 비정규직의 조직화 문제는 절박하지도 않았고 남의 일이었다. 그런 속에서 작은 사업장 노동자들은 방치되었고 조직된 사업장도 무너져내렸다.
현재 한국의 노조 조직률은 12.6%로 '노동운동은 망했다'는 미국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300인 이상 사업장의 경우 68.4%, 500인 이상 사업체는 81.2%가 조직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결국 한국 노동운동의 미래는 작은 사업장 노동자와 비정규직(53%) 노동자를 어떻게 조직하느냐에 달려있음을 말한다. 기업 안의 문제에 매달려 있는 기업별노조 간부가 이들을 조직할 수 있는가. 그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또한 한국의 노조 수는 5천 5백여개를 헤아린다. 1기업 1노조이기 때문에 가능한 숫자이다. 이로 인한 비효율과 낭비는 상상을 초월한다. 인적 재정적 자원이 모래알처럼 흩어져 노동자 전체의 단결이나 총파업은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한국의 모든 노조는 일년에 한번 임금교섭을 하고 2년에 한번 단체협약교섭을 한다. 5천 5백여 노조의 교섭위원, 교섭준비 기간을 포함한 교섭기간, 소모적인 쟁의 등 연간 교섭비용은 수천억 원을 상회한다. 노조는 노조의 자원을 소모하고 경영자는 경영자원을 허비하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기업별노조는 최근 들어 초창기의 건강성을 상실하고 기득권화 특권화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 작은 사업장이나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대하는 큰 노조들의 태도는 우려할 만하다. 이들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자신들의 이익이 떨어지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산별노조 추진에 있어서도 하향평준화 된다는 이유를 들어 소극적이다.
결과적으로 현재 기업별노조는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고 '도저히 어찌 해볼 수 없는' 한계에 처해 있다는 것이 노동계 전반의 평가이다. 그리고 그 역사적 배경이나 자본주의 발전 단계는 다르지만 백년 전 직종별노조가 직면했던 위기와 많은 부분 유사하기도 하다.
3) 2002년 법 제도의 중대한 변화
직종별노조의 대안은 산업별노조였다. 기업별노조의 대안 역시 산업별노조인가. 아직까지는 노동조합의 조직형태에 있어 산별노조를 능가하는 조직은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국의 노조들이 추진하는 산별노조는 서구의 산별노조와는 많은 차이를 보일 것이다. 처음부터 기업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노동조합, 자유롭게 옮겨다닐 수 있는 횡단적 노동시장의 형성, 노동조합에 대한 사용자들의 인식, 노조의 역사와 전통 등 서구의 노동조합은 한국의 노조와는 현저히 다르다. 해당 기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노동조합, 해고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종단적 노동시장, 노조에 대한 사용자들의 천민적 마인드, 그런 점에서 한국의 산별노조는 한국적 산별노조가 될 것이고 그 핵심 과제는 기업별 의식의 극복과 산별교섭의 성사문제가 될 것이다.
2002년부터는 노조 전임자에 대한 임금 지급이 금지되고 기업 단위 복수노조가 허용된다. 또한 복수노조의 허용으로 교섭창구단일화가 강제된다. 앞서 언급한 기업별노조의 한계는 노동운동의 이론적 문제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2002년 노사관계 법 제도의 변화는 기업별노조에게 절박한 위기로 강제되고 있다. 기업별노조로는 더 이상 존립할 수 없다는 급박한 위기 의식, 이것이 노동계가 산별노조로의 전환을 서두르는 현실적 이유이다.
노조 전임자에 대한 임금 지급이 금지될 경우 노조활동의 약화나 위축을 초래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현실적으로 오백 명 이하의 노조는 전임자를 두기가 힘들고 대규모 노조도 전임자가 대폭 축소돼 사정은 마찬가지다. 노동조합에 있어 전임자 유무 여부는 노조의 존폐를 가름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기업 단위 복수노조 허용은 전임자 임금 문제보다 더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하나의 기업에 숱한 직능별노조가 생겨날 수 있다. 현대자동차 같은 거대 기업의 경우 입장을 달리하는 수십 수백 개의 정파별 노조가 가능하고, KBS노조는 기자노조 PD노조 아나운서노조 기술직노조 등 다양한 직종노조가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다. 또한 기존 노조에 대항할 수 있는 회사 측 노조도 가능하다. 5천 5백개의 기업별노조가 문제가 아니라 수만 개의 노조로 더욱 분할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교섭창구단일화 문제는 복수노조 문제와 연동된 것으로, 여러 개의 노조가 있는데 어떤 노조와 교섭할 것이냐의 문제이다. 배타적교섭대표제, 단순다수교섭대표제, 비례적교섭대표제 등의 방법이 강구되고 있으나 어떤 방식이든 사용자 측이 유리한 파트너를 선택하기 위해 공공연한 부당노동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복수노조 허용, 교섭창구단일화 문제는 개별 기업 단위노조에게 사망선고나 다름없다. 산별노조로의 재편을 통한 인적 물적 자원의 중앙 집중과 효율성 제고를 꾀할 때, 노동조합은 그나마 최소한의 존립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
박강호(언론산별추진위원회 조직위원장)


/ 언론노보 288호(2000.8.24.) 4면

저작권자 © 전국언론노동조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