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하의 <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

올바른 눈으로 일본 바라보기


일본에는 배울 것이 없고

일본 문화는 저질인가?

배타적이고 부정적인

한국인의 일본론을

용기있게 비판


일본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이성적일 수 있을까?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매니아들이 생겨나고, 무라까미 하루끼 등 인기작가의 팬클럽까지 생겨날 정도로 일본문화를 즐기는 층이 늘고 있지만, 독도 문제나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 등 한일간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반일 정서는 폭발적으로 확산된다.
나 자신을 들여다보아도,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서는 한켠에 경원하는 마음이 잠재해 있다. [랴쇼몽] [우나기] 등 뛰어난 영화들이 속속 소개되어도 적극적으로 찾아보고 흔쾌히 좋아하기가 망설여지고, 이런저런 연유로 알게 된 일본사람들과의 교류에도 어쩐지 소극적인 자세가 된다. '이러다가 친일파가 되지 않을까?' '일본을 아는 것이 혹시 일본을 추종하는 길이나 되지 않을까?' 말하자면, 이런 걱정이 의식의 저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과거 식민지 피지배 경험이 야기한 일본 컴플렉스는 우리가 일본을 이성적·객관적으로 보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동안 일본의 장점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과 일본을 경계하자는 반일론이 공존하면서, 일본에 대한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탐구에는 참으로 소홀했다. 90년대 이후에는 {일본은 없다}(전여옥)의 선풍적인 인기가 말해주듯이, '일본은 나쁘고, 일본에선 별로 배울 것이 없다'는 담론이 주류를 이뤘다. 이젠 우리도 선진국 대열에 끼여들었다는 경제성장에 힘입어, 말하자면 '자신감'을 얻은 것이었다.
박유하의 {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는 '반일 민족주의' 주장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책이다. 일본을 욕하기는 쉬워도, 옹호하거나 이해하자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은 잘 알려진 일본에 대한 갖가지 '상식'들과 부정적인 일본인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조목조목 꼬집어 낸다. 한 대목씩 읽다보면, 현재 유포되어 있는 일본과 일본인에 관한 이미지들이 얼마나 근거가 박약한 이론과 무리한 주장이 만들어낸 허상인지 생생하게 실감하게 된다. 그만큼 저자는 용기있게 자기주장을 펴고 있으며, 서술 또한 간결하고 명쾌하다.
일제가 우리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명산의 혈맥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주장은 과연 타당한 것인가. 일본에는 풍수신앙이 없는만큼,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한다.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에 대해서도, 과거를 청산하고 역사를 바로 세운 현명한 선택이었는지 비판한다. {일본은 없다}는 "유독 못생긴 곳만을 보면서 그것을 상대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눈이 나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빗나간 일본론이라고 한다. 이영희의 {노래하는 역사}와 김진명의 소설의 문제점들도 신랄하게 지적한다.
저자는 지성인이라 할 서울대 교수들의 저술과 언론의 반일 논조에서도 왜곡된 자존심과 우월의식 뒤에 숨겨진 열등의식을 읽어낸다. 일본의 과거사 사죄, 일본인의 '이중성'론,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 나타난 일본관 등 심화된 주제로 나아가면서도 일본을 바로 보자고 '용기있게' 자기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가 비판하는 것은 민족주의의 배타성이고, 되풀이 강조하는 것은 공존을 위해서 "차이의 배제가 아니라 차이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의 관점을 전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지만, 반일 담론들이 만들어낸 허상들을 시원하게 벗겨버림으로써 일본을 '나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그의 얘기는 충분히 신선하고 유익하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일본의 이미지는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일본의 이미지다. 그 추하고 부정적인 이미지의 이면에는 우리 자신의 긍정과 미화가 있고, 열등의식과 피해의식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왜곡된 일본관을 해부하는 일은, 저자가 시사했듯, '한국의 정신분석'에 다름아니다.


김 이 구 (문학평론가, 창작과비평사 편집국장)


/ 언론노보 289호(2000.9.7.)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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