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문석의 세상시비]
이제 ‘공공성 대 반공공성의 전선’에 서야 한다



지난 11월24일 언론노조 창립 기념식에서 신학림 언론노조 위원장은 창립 기념사를 통해  오랜 기간 동안 진행되어 오던, 그래서 지금은 어느 정도 정리된 의미 있는 ‘하나’를 선언한다. 언론노조 홈페이지에 나온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지금 한국사회의 상황을 진보 보수 세력 간 전선이나 대립으로 보지 않으며, 한국사회를 철저하게 공공성을 파괴하는 세력과 공공성을 지키려는 세력과의 한판 싸움...공공성 파괴 세력과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우겠다.”

민주 對 반민주 전선

지금부터 19년 전이다. 1987년 6.10항쟁. 들불처럼 퍼져나간 반독재투쟁의 함성은 급기야 한국 민주운동의 종속변수였던 노동자로 하여금 소위 ‘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에 불을 붙이며 당당하게 독립변수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아니 6.10항쟁은 7-8월 노동자 대투쟁의 도화선이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노동계급 대 기득권세력간의 계급투쟁의 성격을 지니면서도 노동자뿐만 아니라 청년학생들, 심지어 화이트칼라로 분류되던 넥타이부대들이 조직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였음은 분명하다. 민주노조로 대표되는 노동자계급의 조직화와 더불어 시민사회라는 새로운 운동의 영역이 열린 것이다. 민주 대 반민주 전선이 일군 성과다.

반신자유주의 對 신자유주의

그로부터 10년 후, 지금부터 10년 전. IMF환란이 터진다. 후폭풍은 거셌다. 도시를 배회하던 ‘신자유주의유령’이 도시를 삼켜버렸다. 노동자들은 쪽박 차고 거리는 노숙자로 넘쳐흐른다. 여전히 광화문 지하도의 밤은 노숙자들에 의해서 점령되고 있다. 한 번 무너진 노동자들의 생존권은 10년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고, 빈익빈 부익부의 쇠사슬은 더 단단해져 간다. 문제는 ‘민주 대 반민주의 전선’은 국민들에게 너무 분명한 ‘이미지’를 제시했고, 자연스럽게 논쟁의 영역에서 투쟁의 영역으로 이전하며 조직과 영역을 확대한 반면, ‘반신자유주의 대 신자유주의 전선’은 전선이랄 것도 없는 혼란만 가중시킨다. 한 때 민주진영으로 분류되던 ‘사람’들이 대거 ‘신자유주의자’로 변신을 거듭한 끝에 사실상 국민들이 이해하는 그리고 언제든지 실천으로 공간으로 이전할 수 있는 ‘전선’이 허물어져 버린다. 김대중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이런 전선이 허물어져버렸다고 투덜대는 ‘운동가들’이 많다. 과연 그럴까? 운동가들이 시대적 패러다임을 제대로 짚지 못하고, 막연히 과거의 ‘같은 편’으로 분류하면서 새로운 전선과 전선의 이름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공공성 대 반 공공성

2006년 11월. 언론노조가 ‘공공성 대 반공공성’의 전선을 선언했다. 이 논의가 위원장의 개인적인 주장이든 조직적인 합의와 결의를 거친 깃발이든 중요하지 않다. 새로운 전선의 내용과 전선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등장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론노조에 의해서 ‘공공성 대 반공공성’의 전선이 등장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 공공의 영역에 언론노조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한국의 공적 영역이 무엇인가? 의료, 교육이 그것이다. 그리고 미디어 특히 지상파방송이 그 중심에 서 있다. 빈익빈 부익부의 쇠사슬이 견고해 지고, 그 결과로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그 나마 존재하는 이들 대표적인 공공영역인 의료 교육 지상파가 완충지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료로 뉴스 드라마 오락 스포츠 영화 음악 교양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매체가 지상파다. 신문 등 다른 매체와 달리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으로부터 특정집단이나 세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가장 자유로운 구성체가 지상파방송이며, 그 구성체의 존재적 독립성이 프로그램으로 간혹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최소한 정보와 교양 그리고 여가의 양극화 완충지대로 그 역할은 크고 대단하다.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언론노조, 새로운 전선에서 공공의 깃발을 들어야

이제 언론노조는 새롭게 구성되는 전선에서 ‘공공성 대 반공공성의 전선’에서 공공성의 깃발을 치켜들어야 한다. 더 이상 구패러다임의 전선 개념에서 ‘한 때 우리 편이었는데...’하는 아쉬움을 극복하고, 오늘 당장 ‘그들’이 말하고 정하여 집행하는 정책이 공공성을 갖추었다면 적극적으로 옹호 지지해야 한다. 반면 ‘그들’의 정책이 반공공적 성격을 띄고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타격함으로써 ‘한 때 우리 편’을 ‘또 다시 우리 편으로’ 견인하든지 아니면 고립무력화 시켜야 한다.


// 언론노보 제427호 2006년 11월 29일 수요일자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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