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기고
선생님, 빨간 내복 들고 곧 찾아뵙겠습니다!



길을 잃었습니다. 그 동안 수없이 선생님 그리고 지역 어르신들과 함께 했던 장소였는데, 그날은 그만 길을 잘못 들고 말았습니다. 12월30일, 2006년 마지막 토요일에 선생님과 점심식사 하러 가는 중이었지요. 벌써 2년, iTV 방송 중단 이후 참 많은 세월이 이렇게 길 위에서 지났네요. 더군다나 2006년 역시 이렇게 지나가리라고는 선생님도, 저희도 예상치 못했었지요. 4월에 경인지역 새민방 사업자가 선정되고도, 8개월이 지난 오늘까지 허가장이 나오지 않는 상황을 누가 꿈엔들 생각했겠습니까?

선생님을 뵌 지 벌써 1년 반이 됐습니다. 백발에 꼬장꼬장하게만 느껴지던 선생님, 처음 뵙기 전에 저희가 얼마나 긴장했었는지 모르시지요. 지금 보니 그때는, 저희가 말씀드렸던 ‘건강한 지역방송 설립’이라는 것이 다만 젊은이들의 무모한 용기쯤으로 치부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선생님 주변의 많은 분들 역시 저희와 함께 하시겠다는 선생님을 ‘가능성 없는 일에 힘 빼시지 말라’며 만류하셨다지요. 선생님 결정의 무게를 당시엔 미처 몰랐었습니다.

2005년 7월 경인지역 새방송 창사준비위원회 출범식, 선생님은 지하철을 갈아타시며 먼 길을 몸소 찾아오셨지요. 여든이 훨씬 넘으신 선생님께서는 그 후로도 여러 차례 목동 방송회관 휑한 1층 로비를 찾아오시는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기자회견 끝날 때마다 ‘일하는 사람들이 중요한 일에 신경 써야한다’며, 모셔다드리겠다는 저희를 뒤로 하고 지하철역으로 향하시던 선생님… 참 고마웠습니다.

2005년 8월 매체정책 담당 방송위원과의 면담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당시 방송위원회는 iTV 법인이 제기한 행정소송을 이유로, ‘경인지역 새민방 사업자 공모 일정’ 내놓는 것을 미루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었지요. 그 방송위원은 행정소송이 끝날 때까지는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는 발언으로 저희를 절망과 분노에 휩싸이게 만들었었습니다. 법적 소송을 후속 절차 집행 지연의 이유로 내세우는 방송위원회에 대해, 한 평생 법학자로 살아오신 선생님께서는 ‘법치주의’를 근거로 추궁하셨지요. 소송이 제기될 때마다 손놓고 기다리는 것은 법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직무유기라고 정리하셨었지요.

그 후로 8개월이 지난 후에야 경인지역 새민방 사업자가 결정됐습니다. 사업자로 선정된 경인TV와 창사준비위원회 어르신들의 첫 만남, 그 자리에서 선생님은 저희들에 대한 보증인을 자처하셨습니다. ‘믿을 만한 젊은이들이니, 꼭 일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선생님의 간절한 요청에 눈시울이 붉어진 분도 계셨다지요. 그 이야기를 전할 때마다 제 목이 참 많이도 메어왔었습니다.

그리고 또 8개월, 이렇게 선생님께서 사주시는 설렁탕에 훌훌 말아 다시 한 해를 보냅니다. 헤어지며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함께 식사하다 보면, 곧 일할 날이 있겠지’라며, 언제든지 밥 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2006년이 가기 전에 꼭 한번 만나야한다고 재촉하셨었네요. 또 다시 한 해를 길 위에서 보내는 저희 마음이 시릴까봐서, 평소보다 더 큰 웃음으로 자리를 채워주셨지요. 그 설렁탕 참 따뜻했습니다…

방송 현장을 떠난 지 2년, 수많은 변수와 불확실한 일정 속에 하루를, 한 달을, 또 한 해를 버텨왔습니다. 돌아보건대 긴 공백을 아이디어로 채워왔다며, 그 여행에 의미부여할 만큼 프로로서 투철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으로 인해 우리사회에 어르신이 계심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 지역 리더들, 많은 방송 현업인들 그리고 1만 5천 시민 발기인들께서 보여주신 변함없는 지지와 가르치심이 자양분이 되어 제 몸 속에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2007년, 다시 한번 달려보자’고 깊숙이 웅크려있던 저에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저희는 살아있고, 제 속에 PD의 심장은 아직 멈추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새해 더욱 건강하세요. 곧 빨간 내복 들고 달려가겠습니다!

- 전광식 (희망조합 조합원 / 前 iTV PD)


// 언론노보 제429호 2007년 1월 10일 수요일자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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