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 후계구도를 둘러싼 형제간 각축은 많은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넘어 분노를 촉발시켰다. 특히 비슷한 시기에 종영된 TV사극 「왕과 비」와 맞물려 재벌들의 경영행태가 왕조시대를 방불케 한다는 착각을 일으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문들은 TV사극처럼 `안개 속 후계구도', `왕심(王心) 오리무중', `MK-MH 줄서기 전쟁', `역전, 재역전…왕자의 난' 등의 제목 아래 현대그룹의 후계구도 파문 전말을 중계하는 데만 열중했고 주주와 국민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는데는 인색했다.
상당수 신문이 사설과 기자수첩, 혹은 시리즈 등을 동원해 재벌개혁의 당위성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오너 중심의 경영구조와 2세 세습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외국과의 사례비교 등을 통해 재벌개혁의 방향을 모색하는 기사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아 변죽만 울리고 만 느낌이다.
이 대목에서 더욱 눈여겨봐야 할 것은 신문들간의 입장 차이에 따른 논조의 스펙트럼 현상이다. 여기에는 신문의 소유구조나 경영여건, 주독자층 등이 적잖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대표적 재벌언론인 중앙일보 보도를 보자. 27일자 사설 `현대가의 후계갈등'에서는 "황제적이고 가족적인 경영형태가 대내외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대단히 부끄럽고 유감스럽다"고 지적한 뒤 "이번 파문이 혹 정부의 개입적 재벌정책을 가속화하는 빌미를 주고 사회단체들의 재벌 경영관행 타파운동에 명분을 제공하게 된다면 재계의 자율적 개혁은 물건너간다"며 우려 섞인 시각을 보였다.
현대그룹과의 독립을 선언한 문화일보의 태도는 더욱 노골적이다. 27일자 신문은 `정명예회장 몽헌체제 배경 차분히 설명', `사태수습 박차, 세계적 기업으로 재도약', `정명예회장 건강 이상없다' 등의 제목 아래 철저하게 현대그룹의 입장을 대변하는 기사로 일관했다.
28일자 사설 `현대와 사회적 책임'에서도 "우리는 기업 내부문제를 두고 정부가 직접 관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대출 회수 같은 극약 처방을 말하는 것은 오히려 기업의 신인도를 더 떨어뜨리게 된다" 운운하며 일반 국민의 정서와는 동떨어진 주장을 내세웠다.
세계일보 역시 `현대 거듭나기 지켜보겠다'는 제목의 27일자 사설을 통해 "현대가 내분을 씻고 경영혁신의 선봉장이 되기를 기대한다"며 다분히 현대의 입김을 의식한 듯한 조심스런 논조를 펼쳤다.
경제지들도 서울경제를 제외하고는 관련 사설을 싣지도 않았으며 파문의 전말과 앞으로의 전망을 소개하는 데 그쳤다.
이런 가운데 조선일보는 사설, 칼럼, 박스기사 등을 동원해 현대그룹의 시대착오적 경영행태를 질타하는가 하면 한국과 경향은 28일자부터 각각 시리즈 `재벌 개혁 아직 멀었다'와 `황제경영 이대론 안된다'를 연재해 상대적으로 돋보였다.
황제식 경영의 문제점은 현대그룹에 그치지 않는다. 사실 현대그룹도 아들간의 불화가 불거져나오지 않았다면 국민들의 감시의 눈길을 피해 자연스럽게 2세 승계가 이뤄졌을 것이다.
국민의 여망을 헤아려 미리 재벌개혁을 이끄는 신문이 없었던 것은 대부분 신문의 경영관행 역시 재벌과 별다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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