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3일 민실위 보고서>

<2월3일 민실위 보고서>

이명박 대통령의 인도 방문 때 눈길을 끄는 기사가 있었다. ‘김윤옥 여사, 할머니의 나라 인도 첫 방문’. 아니? 김 여사의 할머니가 인도인이었나? 궁금증이 절로 든다. 기사 내용을 보니 ‘2천년 전 김해 김씨 시조인 가야국 김수로왕이 인도 아유타국 공주와 결혼했으니 김수로왕 후손인 김 여사에게는 인도가 할머니의 나라’라는 것. 낚였다. 이쯤되면 기사가 아니라 코미디다. 그런데도 청와대가 보도자료를 내자 연합뉴스가 기사화했고 헤럴드경제 등 일부 신문이 받았다. 보도자료를 낸 청와대보다도 이것을 여과없이, 아니 오히려 자료에도 없는 ‘할머니의 나라’라는 용어까지 써가며 기사화한 언론이 더 어이없다. 아무리 청와대 보도자료라 해도 최소한의 합리성은 갖춰야 기사화할 수 있는 법이다. 하물며 청와대가 작심하고 기자들을 속이려는 판에 기자 스스로 이런 낚시질에 앞장서는 것은 더더욱 곤란하다.

대통령이 외국 언론사와 한 인터뷰까지도 기자들에게 허위로 전달되고 있다. 김은혜 청와대 대변인은 이 대통령이 영국 BBC 인터뷰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연내라도 안 만날 이유가 없다’고 말한 것으로 브리핑했다. 인터뷰 현장에 우리 기자들이 들어가지 못했으니 모든 기자들이 청와대 발표에 따라 기사를 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KBS가 BBC 방송을 확인해보니 대통령 발언은 청와대 발표와 한참 달랐다. 대통령 발언의 진실은 “(김정일 위원장을) 아마 연내에 만날 수 있을 것 같다”였다. 기자라면 다 안다. 이 두 발언에 얼마나 엄청난 차이가 있는지를...

밤 9시 뉴스에서 대통령의 진짜 발언이 보도되기 전까지 청와대 발표는 모든 언론을 농락했다. SBS는 메인뉴스인 저녁 8시에 청와대 발표대로 대통령 발언을 보도했고, 연합뉴스는 오전에 청와대 발표대로 쓴 기사를 12시간 이상 지난 밤 9시55분에 진짜 발언으로 2보 대체하는 굴욕을 겪었다. 이동관 홍보수석은 ‘대통령 발언이 오해를 살 수 있어서 조금 ‘마사지’를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다’고 해명했다. 외국인들은 우리 대통령의 정확한 발언을 그대로 들을 수 있는데 반해 정작 우리 국민들은 ‘마사지’된 발언만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 기자들 사이에서는 ‘보도자료를 늦게 줘 1차 농락당하고, 틀린 보도자료로 2차 농락당하고, 황당한 해명으로 3차 농락당했다(원래는 더 강한 표현이지만 순화했음)’는 자조까지 터져나왔다.

그런데 청와대의 대통령 발언 왜곡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보스 포럼 참석 기간 녹화한 미국 CNN 인터뷰에서도 청와대가 배포한 보도자료와 실제 방송된 내용이 다른 것으로 확인됐다. 대통령은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인지 아닌지 답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말했는데, 청와대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전략적인 결정을 내릴 때”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자료를 냈다. KBS와 SBS는 대통령의 진짜 발언이 아니라 청와대가 낸 자료대로 보도했다. 통역의 과도한 의역이 소동의 원인이었지만, 청와대 브리핑에 대한 기자들의 신뢰는 이미 땅에 떨어지고도 남았다. ‘4차 농락’ 얘기가 나올 만하다.

정말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우습게 보는 것일까? BBC 인터뷰 왜곡 논란의 책임을 지고 대변인이 사의를 표명한 데 대해서도 청와대가 말을 바꾸고 있다. “공식적인 사의 표명이 아니고, 대변인이 감정적으로 격해서 얘기한 것이 증폭된 것”이라면서 사표는 수리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대통령의 발언이 의도적으로 국민들에게 사실과 다르게 전달됐는데도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왜곡 전달의 가해자는 청와대이고, 피해자는 국민이다. 언론은 중간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중간 피해자이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중간 가해자의 입장에서 국민들에게 사죄해야 하고, 동시에 중간 피해자의 입장에서 청와대에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대변인 사의 표명 번복으로 ‘5차 농락’까지 당한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스스로 나서야 할 시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보도자료를 그대로 믿지 말고 한번 의심해보라’는 청와대의 기사작성법 가르침에 감사해야 할 일이다.
저작권자 © 전국언론노동조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