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한 신문에 묘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홍보도 못했는데 베스트셀러? 누구냐, 넌>. 자극적인 제목의 책 기사였는데, 정작 책 기사 어디에서도 책의 제목을 말하지 않습니다. <삼성을 생각한다>. 신문에서, 포털에서, 지하철에서 광고를 거부당하고도 출간 5주 만에 7만 5천부가 팔린 책, 책 제목을 말할 수 없어 오히려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는 책입니다. 한 교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광고도 못한 <삼성을 생각한다>가 왜 잘 팔린다고 생각하세요? 한국 언론이 삼성을 말하지 않으니까, 이런 책이 잘 팔리는 거 아닐까요? 언론이 삼성을 자유롭게 말하면, 이런 책이 팔릴까요? <삼성을 생각한다>가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것은 반대로 한국 언론이 위기라는 거죠. 그걸 말하고 있는 겁니다.”

KBS는 이제 ‘삼성’을 말하지 않습니다. 자본 권력의 감춰진 사실을 분석하고 파헤쳐서 길어낸 ‘불편한 진실’로 그들을 감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새로운 방식으로 ‘삼성’을 말합니다. ‘기업 열전 K-1’, ‘일류로 가는 길’, ‘명가’, ‘만덕’, ‘부자의 탄생’... ‘불편한 진실’이 아닌 ‘편안한 사실’로 ‘삼성’을 말합니다. KBS는 이제 정치 권력도 말하지 않습니다. 정치 권력의 이면을 파헤치는 탐사보도는 사라지고, 기계적 중립의 틀에 갇혀 현실을 인정하는 방식으로만 말합니다. 가끔은 정치 권력이 KBS에 직접 등장해 20년 전 방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정치 권력의 핵심에 있는 정두언, 김문수, 윤상현 등이 KBS 화면과 마이크를 빌려, 자신들의 말을 자신 있게 하고 있습니다.

수신료를 재원으로 하는 공영방송의 역할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성을 바탕으로, 두 눈 부릅뜨고 권력과 자본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것이라고 입사할 때 배웠는데, KBS의 현실은 이제 그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영방송의 역할이 무엇인지, 언론의 사명은 어디에 있는지 따지고 다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절정이 MBC 의 광우병 보도였습니다. 무죄 판결문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정부 정책은 항상 감시와 비판의 대상이 돼야 하고, 정책 감시와 비판 기능의 수행은 언론 보도의 사명”이라고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어렵게 했습니다. 그만큼 현실이 척박해서입니다.

지난 3월 2일 공사창립 37주년 기념식장, “공정성 확보는 공영방송의 생명입니다. 공정성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무엇보다 사실성과 불편부당성을 확보하는 것이 전제돼야 한다는 데는 의견이 일치합니다.” 김인규 사장의 말입니다. ‘사실성과 불편부당성’을 말하면서도 ‘감시와 비판’은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김인규 사장의 ‘확실한 공영방송론’의 실체이자 한계입니다. 김인규 사장은 그날 공사창립 기념식장에서 취임 100일이 돼서 감회가 새롭다고 했습니다. 김인규 사장과 함께 시작한 새노조의 각오도 남다릅니다. ‘김인규 사장 100일’은 새노조가 왜 필요한지, 절실하게 느낀 100일이기도 합니다.

- 엄경철 드림

 

 

* 이 글은 KBS본부 출범 특보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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