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사 '쥐잡기 작전' 그리고 광주포로수용소

장맛비가 계속되던 6월 24일, 취재진은 경남 산청군을 찾았다. 지리산국립공원 자락의 시천면 일대는 천왕봉으로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고 풍광이 아름다워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그러나 60년 전, 이곳은 가슴 아픈 한국 현대사 비극의 현장이었다.

시천면에서 만난 이통주 할아버지(79살)는 지금도 치가 떨리는 듯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지리산 여기는 6.25 전쟁도 난리지만, 6.25전쟁은 아무것도 아닌기라요.” (이통주씨 증언)

1951년 초겨울, 갑자기 비행기가 뜨고 토벌군이 산 정상으로 밀고 올라왔다. 국군의 마지막 지리산 토벌작전이 대대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백선엽이 지휘하는 ‘백(白 )야전전투사령부’(이하 백야사)가 투입됐다. 그의 이름을 붙힌 부대였다. 예하 병력만 3만 명 남짓. 작전명은 ‘쥐잡기 작전(Operation Rat Killer)이였다.

보급품을 지고 국군과 함께 지리산에 올랐던 이통주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수도사단이 이쪽에 들어오고 다른 사단이 또 전라도 지역에 들어오고 그래가지고 지리산을 뺑 둘러싸고 밀고 올라간 택이지. 그래서 지리산은 거의 소탕이 됐지요.(이통주 씨 증언)

다음해인 1952년 3월까지 이뤄진 백야사의 ‘쥐잡기 작전’은 지리산 정상을 향해 포위망을 좁히면서 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키는 토끼몰이 방식의 토벌작전이었다. 군의 소개((疏開) 작전으로 마을은 불탔다. 주민들은 어디론가 끌려갔다. 작전이 벌어진 다섯 달 동안, 4개도 9개 군에 걸친 20만 명의 지리산 주민들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막내 숙모, 두 살 사촌동생 안고 총살당했다”

노인은 물론 막 걸음마를 뗀 갓난아이도 토벌군에 의해 총살당했다고 한다. 삼장면 대하리에 사는 조재현(69살)씨는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사진+조부 무덤 앞에서)

“1951년 무렵 마지막 토벌할 때 토벌군에 의해서 조부님(조주환 당시 55살)이 지리산 중산리 칼바위 근처에서 잡혀서 희생당했습니다. 몽둥이로 맞아 하반신이 다 부서져서 돌아가셨습니다. (조재현씨 증언)

양민학살은 계속 이어졌다. 당시 22살의 막내 숙모와 그 품에 안겨있던 젓먹이(조인현)도 토벌군에 의해 총에 맞아 희생됐다. 총살 당시 사촌동생 인현은 겨우 두 살배기였다. 조씨는 아직도 그 두 살 배기 아이를 또렷이 기억했다.

“아주 포동포동하니 참 잘 생겼는데. 아장아장 걸어 다니고. 그런데 총살당했어 ”
(조재현씨 증언)

“또 다른 지옥, 광주 포로수용소”

취재진은 처음 집단양민 학살 희생자의 유가족을 수소문했다. 그런데 1951년 백야사의 토벌작전에서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가 다른 곳에서 죽거나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광주에 있었다는 포로수용소 이야기가 처음 불거져 나온 것이다. 사실 광주 포로수용소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러나 시천면을 비롯한 지리산 인근 마을에선 그 곳에 대한 경험이 아직도 생생했다.

“광주 포로수용소 간 사람은 (김)우태도 있었고 우리 자형도 있었고 정오교 부친도 갔었고 저 밑에도 세 사람 되고. 근데 그 사람들은 빨갱이도 아니였어, 다만 빨갱이에게 먹을 거 주고 짐져다 준 그 죄로 간거지. “ (시천면 주민 정재근(83살)씨의 증언)

백야사의 작전 방식만큼 무자비했던 것은 작전 중 붙잡힌 지리산 주민들의 처리였다.
토벌군에 붙잡힌 것은 빨치산만이 아니었다. 대다수는 산으로 피난 갔던 지역민들. 백야사는 일단 생포된 민간인들을 광주에 있는 포로수용소로 이송했다.

“젊은 남자는 거의 없고, 대부분 어린 아이들, 젊은 여자들, 다 쪼그라진 할마이들, 그 사람들이 무신 빨갱이 할끼요? 무신 사상가겠습니까? 안 그렇소? (이통주 씨 증언)

토벌과정에서 잡힌 마을 사람들 수 백 명은 시천면 시천국민학교에 수용되었다가 군 트럭에 몸을 실었다.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조재현 씨도 군인에 의해 강제로 광주 포로수용소로 이동해야 했다.

“산 위 천막에서 하룻밤 자고 신천초등학교로 이송됐는데 잡혀온 사람이 와글와글했어요.
우린 다 머리 숙여라 해가지고 트럭으로 이송됐어요. (조재현씨 증언)

그리고 도착한 곳은 광주포로수용소. 또 다른 비극의 현장이었다. 백야사는 토벌작전이 시작되기 전 이미 광주와 남원에 포로수용소를 만들었다.

“그 당시엔 전남도립병원 자리였어요. 내 기억엔 약간 언덕 같은 데였는데 그 아래 평야에 전부 끝도 없이 천막이 쳐져 있었어요.“ (조재현씨 증언)“

매서운 한겨울에 생포된 사람들 대부분은 입은 옷 그대로 산에서 끌려왔다. 전쟁 와중의 포로수용소, 환경은 열악함 그 자체였다.

“수용소 환경이야 뭐, 지금 생각하면 개 돼지 키우는 곳 같았지.” (조재현씨 증언)

매일 사람이 죽어 나갔다. 추위와 배고픔에 얼어 죽는 이도 있었고, 무엇보다 수용소 내 열병이 돌면서 희생은 더욱 커졌다는 증언이 잇따랐다. 조재현씨는 친척 7명 가운데 6살 사촌동생을 포함해 3명이 광주 포로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증언했다.

“시체를 매일 거적때기 덮어서 트럭에 싣고 나갔어요. 얼마나 죽었을까. 우리 식구만 해도 우리 할머니, 큰 숙모, 사촌이 여섯 살이었는데……. 세 명이 죽었으니까. 열병이 걸려서.
(조재현 씨 증언)

“포로수용소에 갔다가 풀려나온 사람들 얘기 들어보면 쪼매난 아이들, 못 먹여서 굶어죽은
아이도 있었어. 밥 한 주먹씩 주는 거 어른은 악을 쓰고 참지만 아이들이 참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오다가 차에서 아이가 죽어서 밖에 내다버렸단 얘기도 있다 하니까.(이통주 씨 증언)“

당시 광주포로수용서의 최대 수용인원이 4만 6천에서 4만 8천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민간인이었다. 과연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숨졌을까?

“광주로 갔다가 반 수 이상 죽었어요. 지금 같으면 욕 많이 먹었을 겁니다.”

토벌작전 당시 백야사 작전참모였던 공국진 전 예비역 준장의 1965년 증언이다. 1965년 국방부가 작성한 공국진의 증언은 시천면 주민들의 말과 일치했다.

“아이들, 부녀자들을 다 적을 만들고 포로해 오는데 추럭(트럭)에 실고 광주까지 후송하면 다 얼어 죽을 것입니다. 국내 전에서 동족상잔을 하고 있는데 다소 양민과 적을 가려 취급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북 땅에서 가서 8로군 토벌하는 것 하고 다름이 있느냐 했습니다. (중략) 결과가 뭐입니까? 그 엄동설한에 우리는 바카(파카) 입고 히타(히터) 해도 추운데 수많은 양만들이 광주가 갔다가 반 수 이상 죽었어요. 백 장군 당신이 정치적으로 어떤 이유가 있는지 모르지만 성과가 늦드라도 그렇게 해야지... 사고가 많이 났어요. 전시니까 그렇지 지금 같으면 욕 많이 먹었을 겁니다. (1965년 공국진 증언록)

백선엽 휘하에서 작전을 펼치던 두 사단장 역시 반대했다는 증언도 잇따른다.

“우리가 20일 걸리더라도 백성을 보호하면서 전투를 해야지 성과위주로 하면 안 된다. (중략) 송요찬(당시 수도사단장)도 반대했습니다. 최영희(당시 8사단장)도 반대했습니다. 길이길이 두고 욕을 먹을 텐데...” (1965년 공국진 증언록)”

이렇게 광주 포로수용소는 군 내부에서조차 반발이 일어날 정도로 민간인 희생이 컸다. 공국진 전 예비역 준장은 결국 백선엽과 논쟁 끝에 백야사 작전참모를 그만두게 된다. 그리고 1953년 3월, 문제의 광주 포로수용소는 해체됐다.
그렇다면 이 수용소에서의 숨진 사람은 어느 정도일까? 취재진은 공국진의 ‘반 수 이상 죽었다’는 증언을 확인하기 위해 광주 포로수용소 관련 국가기록을 찾아보았다. 국가기록원을 통해 확인했지만 숨진 사람의 기록이나 통계는 따로 없었다. 이에 대한 국가차원의 제대로 된 진상조사도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백선엽이 진두지휘한 백야사의 토벌은 공국진의 증언처럼 ‘성과위주’의 무차별한 작전이었다. 또 공국진의 증언처럼 적과 민간인의 구분도 없었다. 백선엽은 그렇게 한국전쟁의 영웅이 됐다. 어쩌면 그의 공적은 희생된 무고한 양민의 피로 쌓아올려진 것은 아닐까? 취재진이 만난 경남 산청의 민간인 희생자 유족 정맹근씨는 이렇게 주장했다.

“이승만 정부가 정권 수립하면서 친일 행위 했던 사람 대거 기용하지 않았습니까. 친일파가 살아남기 위해선 공로 많이 세워야 했죠. 그 길은 이승만 주장하는 ‘반공’에 맞는 공로 세워서 전과를 많이 보고해야지. 그러다 보니 무고한 양민 죽이고 그것을 전쟁 성과인양 보고하고 공산주의 빨갱이들 죽였다고 보고하고 했겠죠. 저희 판단은 그렇죠 (정맹근씨 증언)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기억하기 위해 진실은 밝혀져야

산청군 현지에서 광주포로수용소 피해자를 찾는데 애를 먹었다. 광주포로수용소에 끌려간 이 대부분이 사망했으며, 전쟁을 기억하고 있는 노인마저 적었다. 취재진은 진실을 규명하기에 시간이 많지 않음을 절감했다. 민간인 학살의 비극은 이렇게 세월에 묻혀버려도 되는 것일까?
1951년 마지막 지리산 토벌 작전, 민간인 학살의 책임을 져야할 당시 군책임자인 백선엽도 이미 고령이다. 비극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이제는 진실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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