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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 백선엽의 간도특설대
빨치산토벌에서의 민간인집단학살사건
안정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前 조사관
[0호] 2011년 07월 19일 (화) 17:09:25 민실위보고서 밀실위

1. 간도특설대 시절

“한국전쟁 전후의 빨치산 토벌 수행에서 간도특설대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백선엽 인터뷰, 2004. 2. 13)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백선엽, 「군과 나」).

백선엽은 한국전쟁 전후, 두 번에 걸쳐 빨치산 토벌에 나섰다. 첫 번째는 1949년 7월에 정보국장을 사임하고 5사단장을 자청, 호남지역의 토벌작전에 뛰어 든 것이고, 두 번째는 1951년 11월 미8군사령관 밴 플리트에 의해 ‘백 기동대(Task Force Paik)’ 총지휘관으로 임명되어 지리산 일대의 토벌작전에 뛰어든 것이다. 그는 두 번의 빨치산 토벌작전에서 간도특설대의 경험이 주효했다고 밝히고 있다.

1938년 9월 15일에 창설된 간도특설대는 여러 연구에서 밝혀졌다시피 일본이 조선 청년들을 모집하여 반만항일세력 말살을 위해 이이제이, 즉 조선인으로 하여금 조선인을 말살하기 위해 만들었던 ‘독립군 사냥개 집단’(남창룡 2000, 머리말)이었고, 이들의 만행은 이미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다음과 같이 정리된 바 있다(연변역사연구소 1960).

일제의 ‘3광정책’을 충실하게 집행하였고, ‘소탕’활동을 적극적으로 조직하였으며, 일체 야만적이고 잔인한 수단을 이용하여 항일연군과 기타 애국항일조직에 피비린 진압을 강행하였고, ‘토벌’ 중에서 애국항일지사와 무고한 백성들을 대량으로 도살하여 많은 비참한 혈안을 조작하였다. 동시에 항일유격지역의 백성들에 대하여 체포, 방화, 강간, 약탈 등 죄악적인 활동을 창궐하게 진행하였다(앞 책, 17).

일본은 반만항일세력을 소탕하면서 “백 명의 군중을 죽이면 그 가운데 공산당이 한 두 명은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대학살을 자행하였다(신주백 2000, 297-298). 이는 소위 ‘초토화작전’이라고도 불리는데, 만일 빨치산이 부락에 침입하는 것을 묵인하거나 은닉, 또는 비밀리에 지원하면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부락의 전 주민을 깡그리 죽이고 가옥과 가재도구를 소각하여 전 부락을 문자 그대로 초토화시키는 것을 뜻했다.

백선엽은 간도특설대 정보반에 소속되어 열하성 팔로군 토벌에 종사하면서 특수공작, 특히 정보수집에서 공적을 세웠다(사사끼, 45). 정보반의 존재와 그 잔인성은 조사서(연변역사연구소)에서도 확인된다. 즉 “토벌활동을 강화하기 위하여 이 부대는 열하에 정보반을 건립하고 기층 정보역량을 부추켜 정보를 수집하고 가혹한 형벌로 심문하며 항일조직을 와해하는 등 활동을 적극 내밀었다(앞 책, 17).”

그는 정보수집을 위해 중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는데, 이 때의 중국어 실력은 훗날 여순사건토벌 시 정보국장으로 있으면서 5여단장으로 진압작전을 벌이고 있던 김백일과 도청이 불가능한 중국어로 처리하여 미고문관으로부터 ‘최상급 보안통화’로 평가(하우스만 1995, 183)받기도 하였다. 또한 백선엽은 한국전쟁 중 중국군과의 교전 시 화교를 모아 수색대를 편성하여 중국군의 정보를 수집하고 포로 확보 등의 전과를 올렸는데, 그는 중국군 포로를 직접 심문하여 중요한 정보를 얻었고, 휴전 회담 시에는 중국대표와 중국어로 대화할 정도로 유창하였다.

백선엽이 거명하는 간도특설대 출신 동지는 김찬규(후에 김백일로 개명), 송석하, 김석범, 신현준, 박창암(백선엽 1989, 111) 뿐만 아니라 이용, 이동화, 박춘식(백선엽, 1993, 184) 등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한국전쟁 전후 시기에 빨치산 토벌을 주로 했다는 것이다. 김백일, 송석하, 박춘석은 위만 훈장을 받았고, “일제 패망 후 남조선으로 도망간”(연변역사연구소 1960, 135, 153)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백선엽은 “발군의 실력을 가진 간도특설대 출신”이며, “만주와 화북에서 풍부한 게리라 토벌의 경험을 갖고 있었”던 이용, 이동화, 박춘식(백선엽 1993, 184)을 후술하는 ‘백 기동대’에 부하 연대장으로 거느렸다.

2. 월남과 경비대 시절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으로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당한 후 시베리아 유배를 피해 재빨리 고향 평양으로 도망한 백선엽은, 북한에서 만주군 간도특설대 출신인 자신이 설 땅이 없어지리라는 위기감에 월남을 결심, 1945년 12월 27일 밤, 38선을 넘었다. 월남 직후 미군정의 경비대 창설을 지원하고 있던 일본군 출신의 이응준을 찾아가 추천형식을 빌어 1946년 2월 27일에 경비대 중위로 임관하였다.

이응준은 자신의 일본군 전력을 문제삼기는 커녕 절대적으로 인정해 주는 미군정에 적극적으로 협조, 1946년 1월 5일에 군사고문으로 취임하여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을 대거 경비대에 입대시킨 인물로, 자신의 친일 전력 시비를 잠재우기 위해 경비대 모병 시 사상검증 등을 요구하였으나 미군정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백선엽은 자신의 과거 군사경험을 인정받아 군사영어학교를 거치지 않고 바로 부산에 창설 중인 5연대에 부임하였는데, 이 때부터 일제 시 평양사범학교를 다니면서 일본인 교사로부터 “발음은 엉망이지만 열심히 배웠”던 영어를 이용, 미군과의 소통에 큰 불편을 느끼지 않았던(백선엽 인터뷰, 2004. 2. 13) 점을 이용, 미군에 의해 주도됨으로써 철저하게 미식화되어 가고 있던 경비대에서 입지를 닦아 나갔다. 그는 간도특설대 정보반 전력을 배경으로 1948년 4월 11일부터 1949년 7월 30일까지 정보국 창설 초기 정보국장을 역임하면서 여순사건과 숙군을 지휘하였다.

여순사건 이후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이승만 정권의 안정에 회의적인 눈초리를 보이던 미국에게 빨치산 토벌은 리트머스 시험지로 판단되었다. 자신의 정권안정과 유지를 위해 친일파를 비호하였던 이승만은 일본군, 만군 출신들에게 빨치산 토벌을 맡겼고, 일본군의 초토화작전을 몸에 익히고 있었던 이들은 이승만의 요구에 충실히 부응하였다.

3. ‘백 기동대(Task Force Paik)’와 민간인집단희생

‘백 기동대(Task Force Paik)’가 한국전쟁기 민간인집단희생사건에 책임이 있음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국가기관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규명된 바 있는데, 초토화 작전을 내걸었던 소위 ‘거창사건’ 등으로 알려진 전쟁기 11사단의 민간인집단희생사건과 동일한 양상을 보였다.

‘백 기동대’는, 후방안정을 도모하라는 미국의 압력을 받은 이승만이 미8군사령관인 밴 플리트에게 단기간 내에 빨치산 세력을 뿌리뽑으라는 요청을 함으로써 만들어졌다. 밴 플리트는 작전의 총기획․감독․연출을 담당하였고,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의 경험을 살려 충실하게 밴 플리트의 요구에 부응하였다. 밴 플리트는 2차 세계대전 후 그리스의 미군사고문단장을 지낸 인물로, 게릴라 토벌을 정치적 안정의 목표로 삼았던 그리스 왕실에 충실한 협력자였다. 그는 게릴라 전투를 ‘사냥’에 비교한 인물이었다. “사냥감이 나타나면 곧바로 사격해야 한다. 지체하게 되면 노루나 새는 숲 속으로 사라지게 되며, 다시 이들을 찾으로 다녀야 한다”(Paul F. Braim 2001, 297-298). 이러한 생각은 한국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으며, 그 결과 ‘백 기동대’의 작전명은 ‘쥐잡기 작전(Rat Killer Operation)’으로 명명되어 미8군작전명령서에 등장하게 된다.

밴 플리트는 그리스에서부터 자신의 휘하에 두었던 다즈(William Dodds) 중령을 60여 명으로 구성된 미고문단의 선임자로 임명하여 ‘백 기동대’의 작전을 지원하게 하였다. 미고문단은 장비지원과 함께 작전연락, 통신, 공중연락 및 정찰, 심리전을 담당하였고, 수 백만 장의 투항권유 전단이 미극동사령부에서 공수되어 지리산 일대에 뿌려지는 등 대대적인 지원에 나섰다. 백선엽은 이승만과 밴 플리트의 요구에 부응, 단기간 내에 지리산에서 뿌리를 뽑겠다고 하면서 다소의 희생이 있더라도 자신의 구상을 밀어 부치고자 하였으며, 작전참모 뿐만 아니라 수도사단장과 8사단장도 이에 반대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밴 플리트를 등에 업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 간도특설대 경험을 살려 초토화작전을 구사하였다. 그 결과는 무수한 민간인집단학살로 나타났다.

‘백 기동대’는 통상 나이와 행색 등으로 이들이 빨치산이 아닌 가족단위의 피난민임을 인지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사살해 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토벌과 학살은 당시 상황을 목격한 특공대원 출신의 진술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토벌 시 젊은 남자들은 없고 피난민으로 보이는 어린아이와 여자들, 노인들만 있었다. 군인들이 이들을 발견하여 이들이 갖고 있던 고추, 파, 소금 등은 눈밭 위에 다 버려 버리고, 쌀과 소고기는 빼앗아 먹어 버리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나이 든 할아버지를 몽둥이로 구타하는 장면도 목격하였다. ... 피난민들은 빨치산이 “검둥개가 오면 주민들 다 죽는다”고 해서 지리산으로 들어갔는데, 군인들이 이들을 다 빨치산으로 몰아 토벌했다. (이00 인터뷰, 2009. 10. 22)

조재현씨(사건 당시 7세, 삼장면 대하리 보안마을 거주)는 1951년 겨울, 백임무부대의 토벌이 시작되자 모든 가족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지리산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당시 미수복 지역의 주민들 사이에는, 한국군과 경찰이 빨치산 영향권에 있는 주민들, 특히 청장년들을 총살한다는 소문이 퍼져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불을 짊어진 채로 야산으로 피난을 다니고 있었다.

조재현의 가족은 피난 초창기에 마을 근처인 삼장면 일대 지리산 자락에 있다가 써리봉, 중산리 여내골 칼바위 등을 전전하며 피난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중산리 여내골 칼바위에 움막을 지어 살고 있던 조재현의 가족은 토벌이 시작되자 두 갈래로 흩어졌다. ‘백 기동대’의 토벌로, 한 갈래는 토벌대에 의해 발각 즉시 현장에서 사살되고 다른 갈래는 광주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조재현의 조부 조주환(55세)은 산에서 군의 심문 도중 구타로 사망하였으며, 이를 항의하던 작은 외숙모 강월선(22세)과 품에 안겨 있던 아들 조인현(1세)이 군의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진실위 보고서 2010/5, 786쪽). 토벌과정에서 잡힌 조재현의 가족과 마을 사람들 수 백 명은 시천면 시천국민학교에 수용되었다가 군 트럭에 실려 광주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으며, 이송 직후 선별과정을 거쳐 조재현은 고아원으로 보내졌고 나머지 가족들은 그대로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다가 할머니 권선갑, 큰외숙모 김봉순, 사촌 조기현(6세)이 장질부사로 사망하였다. 광주포로수용소는 열악한 환경과 민간인 수용 등으로 당시에도 사회문제로 크게 비화된 바 있고, 수용 인원 절반 이상이 굶주림과 추위, 질병 등으로 사망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정확한 피해 통계는 문서로 남아 있지 않다.

간도특설대의 전술을 그대로 원용,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비민구분없는 무차별 토벌, 즉 초토화작전을 지시했던 백선엽은 “지휘부의 지침과 달리, 말단 부대가 비행을 저지르고 허위보고로 무마하는 경우, 그것을 완전히 확인해 진위를 가리기란 참으로 어렵다... 당시로서는 내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겠지만...”(「실록 지리산」)이라는 어처구니 없고 무책임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4. 백선엽 전쟁영웅화

“내가 치른 전쟁이오, 내 전쟁이었소”
이승만을 비롯한 역대 한국 대통령을 움직였다고 자부하는 일개 미군 대위 하우스만이 자신의 저서(하우스만 1995, 245)에서 밝힌 백선엽의 주장이다. 한국전쟁은 곧 백선엽의 전쟁이었다는 말은 다른 참전자들은 그야말로 졸이었단 말인가? 그리고 한국전쟁의 공과 과를 다 책임지겠다는 겐가? 민간인집단학살까지도? 그런 의미라면 받아들일 수 있지만 아쉽게도 그는 단 한 번도 민간인집단학살에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는 발언을 한 적이 없다. 책임회피성 발언만 있을 뿐이다. 대규모 민간인집단학살을 유발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왜곡하는 다음과 같은 어줍쟎은 ‘민중의식’은 반드시 교정시킬 필요가 있다.

주의주장이야 어찌되었건 간에 민중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평화로운 생활을 하도록 해 주는 것이 칼을 쥐고 있는 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간도특설대는 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기분을 가지고 토벌에 임하였다(「군과 나」).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에 대한 비판에 대해 할 말 없다. 그러나 민중이 고통받고 있었기 때문에 ....만주에서 방치되고 있던 한국인을 위해, 민중의 평화로운 생활을 위해 무력을 사용해야 했다(「대게리라전」)

‘백선엽 전쟁영웅만들기’는 새삼스럽지 않다.
이미 한국전쟁 때부터 시작되었고, 그 주창자는 바로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1952년 겨울,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당선자가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환영대회장에서 “미국에 아이젠하워라는 2차세계대전의 영웅이 있다면, 우리에게도 전쟁영웅이 있다. 바로 그가 백선엽 장군”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군사편찬연구소 2003, 147).

해방 전 미군정보기관과의 접촉을 통해 그 중요성을 일찍이 숙지하고 있던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미 제971CIC 파견대를 모방하여 남한에 CIC를 창설하기로 하여 우여곡절 끝에 특무대를 발족시켰다. 특무대의 주요 임무는 “상부의 특명사항처리”(국군보안사령부 1978, 37-38)였으며, 전쟁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소위 ‘거창사건’의 축소․왜곡․조작이었다(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보고서 2010년 상반기/5권).

이승만은 군에 대해 분리지배(divide and rule)정책을 구사하였다. 그는 군 주요 지휘관에 대한 정치적 조작과 감시를 통해 군부 통제, 즉 포상과 징벌을 적절히 구사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충성과 지지를 확보하였다. 이승만은 김구 암살 후 광복군 출신 철저 배제, 일본군 출신 전면화를 꾀했다. 그러나 1952년에 이승만의 장기집권 야욕이 일으킨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이종찬으로 대표되는 일부 일본군 출신의 군중립화 주장에 부딪치자 이승만은 더 이상 자신이 조종할 수 없는 인물을 군부 요직에 임명하지 않게 된다. 이후 정일권, 백선엽 등 만주군 출신의 젊고 복종적인 인물이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이승만의 의도는 백선엽을 이종찬 후임으로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하면서 “참모총장은 대통령의 말을 잘 들어야 하는데...”(백선엽 1989, 243)라는 이승만의 발언에서 잘 드러난다. 이후 백선엽은 이승만의 명령과 지시를 충실하게 이행하여 이승만이 총애하는 ‘어금니’로 남아 승승장구하였는데, 군최고통수권자가 만들어 낸 군최고지휘관이자 전쟁영웅이었다는 점에서 백선엽은 이승만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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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백선엽 인터뷰(2004. 2. 13)
백선엽, 1989, 「군과 나」, 대륙연구소
백선엽, 1993, 「對게리라戰」, 1993, 東京: 原書房
남창룡, 2000, 「만주제국 조선인」, 신세림
류연산, 2004,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 아이필드
연변역사연구소, 1960, 「위특설부대 조직활동」
신주백, 2000,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1945)」, 아세아문화사
사사끼 하루다까, 강창구(역), 1968, 「한국전 비사」
하우스만, 1995, 「한국대통령을 움직인 미국인 대위」, 한국문원
군사편찬연구소, 2003,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영웅」
Palu F. Braim, 육군본부(역), 2001, 「위대한 장군 밴플리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10년 상반기 보고서 5.
국군보안사령부, 1978, 「대공 3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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