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항쟁은 이승만과 그 정권에 대한 최고 형태의 심판이다
안병욱 가톨릭대 국사학 교수


며칠 전 방송된 백선엽 관련 프로그램은 다소 맥이 빠진 어설픈 내용이었다. 수구집단의 요구에 부응하고자 처음 기획되었던 바가 주위의 강한 비판에 부딪쳐 결국은 이도 저도 아닌 횡설수설한 것으로 끝나고 만 것 같다.

백선엽의 일제하 반민족 행적, 전쟁 중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 학살 책임, 그리고 족벌 사학의 비리 등등 온갖 추악한 경력들은 파행적인 방송을 통해 은폐되었고 기껏 재조명받은 것이란 고작 미군의 칭찬과 신뢰를 받아 한국군의 대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몸소 진두에 나서 패주하던 부대를 되돌려 전선을 사수하도록 독려했고 그 결과로 미군의 신뢰를 얻어냈다고 했다. 당시 한국군은 장비도 부족했고 훈련도 받지 못한 매우 열악한 상태였는데 중공군마저 그 같은 한국군을 표적삼아 공격을 감행해 옴으로써 더욱 어려워진 형편이었다. 당시 백선엽만이 적의 공격을 격퇴할 수 있었던 한국군 지휘관이었다고 했다. 전쟁 당시 미군이 한국군을 지원했던 것은 백선엽에 대한 신뢰가 크게 뒷받침되었다고 했으며 그로부터 오늘날 한국군대의 성장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과 같은 한국군 성장을 가져온 미군의 지원이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된다.

백선엽 본인의 회고에 맞추어 일방적으로 짜깁기한 프로그램을 굳이 제작하여 방송해야 했던 저간의 사정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동안 어렵게 이루어 온 방송 민주화 업적들이 물거품이 되어가고 있다. 많은 것을 누리면서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을 내세워 과거를 미화하고 역사의 책임을 모면하려는 잔꾀는 참으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그 얄팍한 술수는 금방 들통 나 조롱거리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만일 과거를 임의적으로 재단하고 역사를 작위적으로 해석하여 진실을 호도한다면 이는 용납할 수 없는 범죄행위이다. 여기에는 짐작 가는 바대로 방송이라는 사회적 공기의 책무를 저버린 일부 출세 지향적인 간부들의 충성 경쟁도 한몫 했을 것이다.

지금 백선엽을 전쟁영웅으로 내세운 작업은 일련의 불순한 공작 가운데 시작편이다. 알려진 바로는 앞으로 이어서 곧 이승만 관련 프로그램을 만들어 대대적으로 방송한다는 것이다. ‘이승만이 건국대통령으로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어떻게 기여했는지 우리 역사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조명해 보겠다’는 것이다. 오늘의 경제성장, G20의장국 등으로 표상되는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크게 기여한 이승만의 공적을 집중 부각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늘날 위기에 처한 반공 분단 전쟁지향의 수구세력이 존립을 위해 안간힘을 쓰며 꾸미는 뿌리 찾기 사업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조상신을 떠받들듯 이승만의 궤적을 신비화하여 대한민국의 색깔을 재확인하겠다는 속셈이다. 그에 따라 떠받들고 강조해야 할 부분과 매도하고 타격해야 할 부분을 명확히 드러내자는 것이다. 이승만 치하에서 횡행했던 반공테러집단을 활용한 마녀사냥이 이제는 방송의 세몰이 여론화를 통한 극우세력의 색깔 공세로 재현되고 있다.

권력욕에 굶주린 이승만은 헌법도 제도도 헌신짝처럼 팽개치고 극우 반공테러를 앞세워 역사를 파탄 냈다. 사회정의는 말할 것도 없고 인권에 대한 기본 상식도 없었으며 국민들의 최소한의 생존마저 짓밟았다. 결국 이승만은 권력 장악 12년 만에 4월 항쟁의 거대한 국민적 분노로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축출되었다. 곧 4월 항쟁은 이승만과 그 정권에 대한 최고 형태의 심판이다. 달리 이의를 재기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최종적인 평가이다. 만일 이승만을 되살려보려고 시도한다면 이는 주권자 국민을 배신하는 반역이며 인류역사를 뒤집겠다는 어불성설한 일이다. 국민의 저항으로 축출된 독재자를 세치 혀끝으로 부활시키겠다는 것은 무당 푸닥거리만도 못한 무모한 짓거리이다.

그럼에도 터무니없이 꾸미는 수작은 워낙 절박한 위기감에서 비롯된 내년의 두 차례 선거를 염두에 두고 벌이는 공작의 일환이다. 지난날에는 선거 시기 마다 방송언론이 온갖 방법으로 유권자들을 회유 공갈 협박하면서 독재자들을 위한 하수인 역할을 했다. 이제는 과거처럼 직접적으로 나서기가 어렵게 됐다. 그래서 교묘한 방식으로 역사의식을 왜곡하여 국민을 상대로 야바위 치려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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