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시도
김서중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KBS는 많은 비판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6·25 특집 프로그램 ‘전쟁과 군인’을 내보냈다. 소위 공영방송이라는 KBS가 6·25 전쟁영웅이라는 점만을 부각해서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광복군을 토벌했던 친일파 백선엽을 찬양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해서 스스로 공영방송임을 부정했다.

물론 KBS는 ‘전쟁과 군인’이 전쟁 영웅을 중심으로 6·25를 되새겨보는 데 그 의의가 있을 뿐이라고 변명하고 있다. 하지만 프로그램의 방송시기와 구성에서 이미 친일파 미화와 왜곡은 예정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번 특집은 분명 백선엽 특집이다. 소위 6·25 전쟁영웅 백선엽으로 시작해서 백선엽으로 끝나는 전쟁 영웅 다큐멘터리를 만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실과 진실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이 경계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몇 가지 오류들을 범했다.

가장 중요한 오류는 백선엽과 그 관련인물 중심의 다큐였다는 점이다. 백선엽을 직접 출연시키고 백선엽의 언술에 의존하고, 백선엽과 관련된 인사들의 진술에 의존하는 다큐가 백선엽을 본격적으로 해부할 수 있을까? 이는 애초부터 인물 찬양을 예비한 것이다. 어느 인물이 자신을 비판하는 다큐에 응할 것이며, 어떤 제작자가 당신을 비판할 것이니 출연해달라고 부탁할 수 있을 것인가?

제작진이 찾은 자기변명의 지점은 아마도 6·25특집이라는 명분일 것이다. 전쟁영웅 부분만 다루면 될 테니까? 균형 잡힌 평가를 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방어할 수 있는 자기 합리화의 장벽을 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제작진의 담대함에 놀랄 뿐이다. 백선엽이 ‘만주군관학교 입학해 일본군 장교를 지냈으며, 이 전력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는 내레이션에서 보듯 친일파임을 알고 있는 제작진은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역사의 오류로 전쟁 영웅이 된 인물의 한 시기만을 조망하는 것이 초래할 결과에 대해서는 눈감았다. 8·15 이승만 특집 역시 이런 방어벽을 칠 것이다. 독재자 시기가 아닌 독립운동가, 정부수립 시기를 중심으로 영웅 만들기에 나설 것이다.

프로그램 제작자들에게 물어보자. 백선엽이 친일파였음을 모르는 대다수 사람들이 이 프로그램만을 봤을 때, 그들 머릿속에 그려지는 백선엽의 이미지는 어떨지에 대해서 정말 몰랐는지? 나라를 구한 일등 공신, 미국도 인정한 훌륭한 장군, 지금도 선열의 희생 속에 구한 강토를 염려하는 노 애국자. 이런 이미지 이외에 무엇을 그려낼 수 있을까? 애초 의도가 백선엽 영웅 만들기, 친일 이미지 세탁이 목적이라면 모르지만, 그의 친일 경력으로 볼 때 전술한대로 10초도 안 되는 친일인명사전 등재 언급만으로 균형 있는 온전한 평가는 불가능함을 몰랐는지?

‘친일파’ 백선엽을 제대로 조명하지 못했다는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제작진은 프로그램에서 언급하듯이 ‘일상을 송두리째 뒤엎어 버리는 전쟁’이라는 비극, 개인이 아닌 당시 국제정세를 비롯한 경제, 정치, 사회구조가 만들어낸 비극을 해부하지 못하고 개인의 영웅 신화에 매몰되고 말았다. 역사적 인물을 온전히 그 개인에만 의존해 해석하는 개인화 이데올로기가 작동한 것이다. 8·15가 갖는 역사적 의미 또한 이승만 개인 영웅 만들기에 가려지고 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사건은 공영방송이 감히 대한민국의 법통인 임시정부를 공격하던 친일파를 미화하는 방송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사회가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는 더 근본적이고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정부 한나라당의 방송장악은 현 권력을 떠받치고 있는 경제·사회·문화 등 제반 분야의 기득권 세력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고, ‘전쟁과 군인’은 그 의도를 드러낸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8·15 이승만 특집이 그 뒤를 이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런 의혹을 더욱 뒷받침하고 있다. 수십 년간 우리사회를 지배하며 왜곡했던 기득권 세력이 민주화의 거대한 역사적 흐름에 맞서 헤게모니를 되찾기 위한 쟁탈전을 시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파편적인 사실을 근거로 진실을 왜곡하고, 친일파·독재자들의 영웅 만들기에 나서는 것은 그들 시각으로 역사를 새로 써나가겠다는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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