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읽는 남자
- 언론노보 복간에 부쳐


정철훈




남자가 멈칫거리며 한숨을 쉰다.
인상을 찌뿌린다.
구겨지는 소리가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온다
기자들의 발냄새가 오늘의 날씨 아랫칸에 배어 있다.
모든 시제가 과거다
사건과 인물동정과 부음이 과거다
모든 것이 과거에 정지해 있다
만화 주인공들만 까닥까딱 고개를 끄덕일 뿐
고바우와 두꺼비가 안경알을 닦고
전쟁과 고아와 기근이 굵은 선을 두른 박스 속에 들어있다
그날의 살아있음을 기념하는 액자처럼
여러 개의 창문이 열렸다가 닫힌다
홍수와 눈사태와 지진이 활자 속에서 불을 뿜는다
이산가족의 절규가, 헤어진 자의 울부짖음이,
입양아의 마른 눈물이 흥건하다
아침햇살이 사진속 대머리를 맞퉁긴 뒤
아예 보기 싫은 얼굴들을 지워버린다
흑두루미떼가 활자처럼 날아간다
비리 공직자의 구속과 그날의 단식농성과
그날의 교통사고가 다시 한번 행간에서 충돌한다
남자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린다
어젯밤 숙취가 하단 광고란에 시궁창을 만들며 흘러간다
남자가 평생 신문을 놓지 못하는 것은
해설할 수 없는 현상들이
雜文과 非文으로 마구마구 쏟아지는
그 눈물겨운 리얼리티 때문이다
남자는 신문으로 해가 떠오르길 기다린다
상처가 상처를 읽듯
남자의 입술이 복화술자처럼 움직인다
부음란에서 동년배의 죽음이 웃고 있다
책도 페이지도 아닌 것이
팔랑팔랑 넘어가며 손짓하고 있다


약력
1959년 전남 광주 출생
1983년 국민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1994년 러시아 외무성 외교대학원 역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1997년 계간 창작과비평사에 시 '백야'등을 발표하며 등단
현 국민일보 기자



/ 언론노보 278호(2000.4.5.)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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