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호]읽으면 행복합니다
2000-10-11 kfpu
신경림의 <불은 언제나 되살아난다>현실과 함께한 70년대 이후 시의 흐름민중민주지향과 생의 감각을 노래한 절제된 서정시들동시대의 시와 시와 친숙해질 수 있는 길 열어줘시는 때로는 턱없이 시시해 보이고, 때로는 몹시 난해해서 가까이하기 두려워진다. 기껏해야 한두 페이지 남짓 되고, 글자수를 헤아리면 광고지 한 장만큼도 안되는 게 시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윤동주)이나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정지용) 같은 싯구는 금방 이해하고 좋아하며, 무언가 공감과 충일의 느낌에 젖어들기도 한다.그렇지만 역시 현대시는 어렵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고전적인 '낯설게 하기' 등 현대시의 전략 자체가 시적 진술을 일상언어의 맥락과 차별화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으며, 시의 핵을 이루는 시인의 내면 또한 점점 더 공동체 의식이나 보편적 정서로부터 벗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의 범람 시대라 할 정도로 시가 넘쳐나는 것도 오히려 시와 친숙해지고 시를 즐기기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된다. 왜냐하면 시가 넘치는 만큼 좋은 시를 읽을 기회가 많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동시대 시인들의 고뇌와 접촉하고 그들이 마련한 언어의 성찬을 만끽하는 것은 우리들이 누릴 권리이지만, 소문난 시집을 찾아 읽어도 정제되지 않은 잡담과 억지 표현, 요란한 화장술에 실망하고 넌더리를 내게 되기 십상이다. 신경림 시인이 엮은 {불은 언제나 되살아난다}(창비시선 200)는 70년대 이후 범람 현상을 보인 한국시에서 대표작 88편을 골라 실었다. 시집 {농무}를 통해 생활과 현실에 뿌리를 둔 시, 독자와 소통하는 시로 우리 시의 체질을 변혁한 신경림 시인이 자신의 안목과 기호대로 선정한 작품들이다. 길고 난삽한 시보다 단아하고 절제된 목소리들이 한데 모여, 우리들의 귀를 맑게 씻어준다. 여기엔 억압과 모순의 현실을 향한 절규와 염원이 있고, 가볍지 않은 삶의 무게를 감당하며 얻은 생의 감각과 비애와 환희의 서정이 있다. 고은 신경림 이성부 조태일 양성우 정희성 문병란 김지하 등 70년대 반독재 민주화와 민중지향을 노래한 '사회시'들은 거리에서 교정에서 외쳤던 '독재타도'의 외침을 새삼 떠오르게 하고, 뒤를 잇는 곽재구 황지우 최두석 김남주 김용택 박노해 백무산 등의 시는 80년대 시의 '풍요와 영광'을 되살려낸다. 여기 실린 어떤 시도 구호나 선전문이 아니며,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가슴을 딛고 건너가 다시 만나야 할 우리"(문병란 [직녀에게])처럼 슬프거나 비장한 노래가 많다. 이처럼 사회적이고 공공적인 발언의 의미가 강한 작품들 외에도 우리 시의 진폭은 정현종 김광규 오규원 노향림 이성복 등 근대문명 속의 삶을 성찰하고 자연과 생명의 재발견을 추구하는 방향으로도 열려 있다. 10년 단위의 시기 구분이 자의적이긴 하지만, 유하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나 김기택 나희덕 함민복 송찬호 김혜순 최영미 등 90년대로 넘어오면 시가 아무래도 사회 공론(公論)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개인적 감수성이 도드라져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엮은이의 눈은 화려하고 해체적인 작품보다 전통 서정에 가까운 시들을 골라내고 있다. 그동안 시와 친해지고 싶어도 그 방법을 몰랐던 이들도 이 선집의 안내를 따라 동시대 시인들의 시심과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말해지지 못한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고, 생의 어떤 절정들이 응결하는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태하고 무딘 의식에 시가 파문을 던지지는 않는다. "마지막 한방울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공중에 매달려 있"는 "그 무게의 눈물겨움"(나희덕 [찬비 내리고])으로 인하여 파르르 떨리는 잔잔한 마음밭이 없다면, 어떤 연금술사의 언어라도 제 빛을 잃고 시커먼 삭정이로 뒹굴게 될 따름이다. 김 이 구 (문학평론가, 창작과비평사 편집국장)/ 언론노보 291호(2000.10.11) 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