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호]CBS 명예를 위하여
2000-10-11 kfpu
이제 총파업을 시작하는 우리는 사실 승리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싸움을 시작할 때는, 그리고 싸움의 과정에서는, 조합원 모두에게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 노조 집행부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지만, 부끄럽게도 노조 집행부부터 이번 싸움이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이 아직 부족함을 먼저 고백합니다. 우리는 비겁합니다. 어떠한 보호 장치도 갖지 못한 우리의 선배 28명이 권호경 사장 퇴진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내고, 그 때문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포항으로, 마산으로, 심지어는 제주로 유배를 갔습니다. 우리 선배들에게는 정당한 행동을 한 대가치고는 너무나 심한 형극의 유배였습니다. 그들의 배우자와 자녀들도 함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대부분 엄마 아빠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그래서 엄마 아빠가 1년, 혹은 2년, 혹은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를 기간 동안 곁이 없기에 자녀들의 인생이 바뀔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배들은 가시밭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자신들의 주장이 정당하고, 자녀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고 떳떳하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오히려 유배를 선선히, 자랑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 유배는 우리 선배들에게 있어 십 수년, 혹은 이십 수년 만에 다시 언론인으로서의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성스러운 통과 의례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노조 집행부가 정직 3개월(그것도 보도국으로 복귀한 이후에나 적용되는)을 당한 것 이외에는 아무런 불이익도 받지 않았습니다. 노동조합이라는 둥지 안에서 지내 왔고, 불이익을 받지 않는 것에 대해 내심 다행스러워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승리에 대한 확신이 불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일어서고자 합니다. 그것은 역사 발전에 대한 소박한 신념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역사의 방향과 일치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장로들이 들고 일어선 순복음 교회를 보고, 세습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뒤흔드는 광림교회를 봅니다. 천만년 갈 것 같았던 공고한 아성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크지 않기에 그 목소리는 기존의 거대한 권력에 눌려 들리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도 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싸움이 역사의 방향과 같은 길이기에 머지 않은 장래에 반드시 승리한다는 믿음, 우리가 하는 일이 역사의 방향과 일치한다는 확신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갖습니다. 우리는 이제 비겁함이라는 굴레도 모두 벗어 던지고자 합니다. 과거에 그랬듯이 막가파 식의 무차별한 노조파괴가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의 피와 희생을 요구받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역사적인 싸움을 회피한다면,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날까지 죄책감에 시달릴 것입니다. 모든 것을 던진 우리 선배들에게 다시는 얼굴을 들 수 없을 것입니다. CBS가 이 땅에서 전파를 내보내는 한 영원히 손가락질 받는 부끄러운 존재로 남을 것입니다. 사실 두렵습니다. 하지만 용기는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의지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용기를 내겠습니다. 꼭 승리할 것입니다.민경중(CBS노조 위원장)/ 언론노보 291호(2000.10.11)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