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호]이땅의 언론민주화를 위해 헤쳐온 단결과 투쟁의 역사
2000-11-25 언론노련
언론노련이 걸어온 길 12년 <화보>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이 12년을 맞았다. 언론노련은 1988년 11월 26일 이 땅에 자유언론 수호의 기치를 높이 휘날리며 태동하여 오늘 언론산별 노조가 출범하기까지 단결과 투쟁의 외길을 걸어왔다. 1988년 언론노조의 태동기, 89년 언론해방투쟁의 원년, 90년 온 국민이 함께한 KBS 대투쟁, 91년 대동단결의 뜨거운 함성, 92년 자본과 권력에 맞선 파업의 물결, 93년 언론노련의 합법성 쟁취투쟁, 94년 권영길 위원장 수배·해고로 점철된 격동의 한해, 95년 국민과 함께하는 언론개혁 '미디어오늘' 창간, 96년 방송개혁 쟁취를 위한 투쟁, 97년 언론노동자 생존권 쟁취투쟁, 98년 종교재단과의 투쟁, 99년 민주방송법 쟁취를 위한 방송사 연대파업, 그리고 2000년 언론산별노조의 출범까지. 어느 해 빠짐없이 험난하고 고된 여정이었다. 30만 언론노동자의 희망이 될 산별노조가 출범하는 오늘, 빛 바랜 흑백의 기록들을 하나 둘 들춰보며 지나온 길 12년을 살펴보는 까닭은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88년 언론노조의 태동기언론계는 87년 6월 항쟁으로 촉발된 사회민주화 열풍에 힘입어 이듬해 언론사 노동조합의 탄생기를 맞았다. 오랜 곡필과 굴욕의 세월을 넘어 노동자의 권리와 언론민주화를 위해 노조는 당당하게 떨쳐 일어나기 시작했다. 88년 11월 26일 41개 언론사 노조의 참여로 출범한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은 투쟁의 구심이었으며 그 시작이었다.89년 언론해방투쟁 원년언론노련은 89년을 언론해방투쟁의 원년으로 선포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89년은 편집권독립과 노동조합 사수를 위한 파업투쟁의 물결로 화려하게 장식됐다. 많은 노조들이 편집국장 임명동의제·중간평가제를 쟁취해 냈다. 그러나 이영희 한겨레 고문이 연행되고 한겨레 편집국이 수색 받는 만행을 저지르며 언론탄압의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90년온 국민이 함께 한 KBS 대투쟁경향신문 초대집행부 5인의 복직투쟁으로 90년은 시작됐고, 제주에서는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한 제주도민일보를 창간하며 새로운 실험에 나서고 있었다. 그리고 4월, 전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KBS 서기원 사장의 퇴진투쟁. 정권의 언론장악 음모에 날린 직격탄이었다. 그것은 3당 야합 이후 위축되었던 민주 진영의 투쟁 열기를 되살리는 기폭제이기도 했다.91년대동단결의 우렁찬 함성언론노련은 각 단위노조의 투쟁과 단결을 통한 발전을 토대로 조직적인 안정기에 접어들며 창립 3주년 체육대회를 통해 그 위세를 한껏 과시했다. 성균관대 노천극장을 가득 메운 노조의 깃발과 플래카드. 어깨를 맞대고 노동가를 부르며 하나임을 확인했다. 한편, 91년은 수서 사건 촌지문제를 계기로 언론개혁의 자정운동이 본격 제기된 한해이기도 했다.92년 자본과 권력에 맞선 파업의 물결신문사에 불어닥친 무한경쟁의 바람은 주 1회의 휴무조차 보장되지 않았다. 노동조건 개선이 언론노조의 최대현안으로 부각되었고, 때마침 발표된 정부의 총액 5% 이내 임금억제 방침은 동아, 한국 등 신문노조 파업의 불을 당기는 도화산이 되었다. 9월에는 MBC의 공정방송활동 저해기도에 맞선 노조의 파업투쟁이 전국을 휩쓸었다.93년 언론노련 합법성 쟁취92년 12월 22일, 노동조합 설립 때 상급단체 가입이 강제조항이 아니라는 판결이 내려짐으로써 4년여 언론노련 합법성 쟁취투쟁이 마침내 승리로 마감됐다. 한국노총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불법의 굴레는 벗겨졌고 민주노조 진영에 합법화의 길이 열렸다. 안정기에 들어선 93년에는 합법공간을 활용해 다각적인 조직력 강화에 주력했다.94년 권영길 위원장 수배와 해고정권의 탄압은 6월 철도파업에 대한 이른바 '제3자 개입'을 이유로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 공동대표였던 권영길·양규헌 위원장에 대한 수배조치를 단행, 극에 달했다. 서울신문은 덩달아 권위원장을 해고했다. 언론노련은 김영신 당시 KBS노조위원장을 연맹위원장 직무대행으로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11월에는 제4대 연맹위원장에 이형모씨가 당선됐다. 95년 국민과 함께하는 언론개혁, <미디어오늘> 창간마침내 언론노련은 기관지인 언론노보를 대중지로 전환키로 결정, 매체비평전문지 '미디어오늘'을 창간했다. '미디어오늘'은 언론계 내부의 문제들을 국민에게 알려 개혁의 씨를 뿌리기 시작했다. 11월에는 한국 노동운동의 구심 민주노총이 탄생했다. 하나로 합쳐진 민주노조진영의 초대위원장으로 권영길 전 언론노련 위원장이 선출되었다.96년힘차게 열린 연대투쟁의 장 방송민주화 운동은 88년 MBC 파업과 90년 KBS 대투쟁 이후 굵직굵직한 투쟁의 역사를 기록해 나갔다. 개별노조 차원을 넘어 방송악법 개정투쟁 및 방송사 단일노조 설립, 국민주방송 추진 등 연대활동이 활발했다. 신문사 노조 역시 95년 발족한 서울지역 신문·통신노조협의회를 중심으로 휴일보장 및 증면자제를 촉구하며 연대투쟁의 장을 확대해 나갔다.97년노동법 날치기 총파업 97년은 투쟁으로 밝았다. 96년 12월 26일 새벽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 날치기는 전국민적 저항에 부딪혔고 노동계는 총파업으로 맞섰다. 언론노조도 방송노조 연대총파업을 시발로 1월 16일에는 언론사상 초유의 총파업을 단행했다. 11월 IMF는 노동자에게 엄청난 시련을 안겨주었다. 파산과 부도, 명예퇴직과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해고가 강행됐다. 98년8천명이 사라진 최악의 해 언론노련 창립 10년, 그러나 8천여명의 언론노동자들이 거리로 내몰린 한국언론사상 최악의 한해였다. 많은 노조가 와해되거나 사라졌다. 세계일보는 이상회사장을 상대로 절박한 생존권 투쟁을 벌였고 SBS노조는 상송세습 저지를 위한 투쟁에 나섰다. 11월 제6대 연맹위원장에 최문순씨가 취임했다.99년 방송법 쟁취 연대총파업방송사 노조가 연대 총파업의 큰 틀을 다진 격동의 한해였다. 민주방송법 쟁취를 위해 7월12일 KBS MBC 방송위원회 등 방송 3개 노조가 총파업에 돌입했다. 전국 382개 시민 사회 종교단체가 공대위를 만들어 동참, 80년대 이후 시들해진 범국민운동의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시청자참여 프로그램을 법제화하는 성과가 있었으나 방노련 간부 6명이 구속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2000년언론산별노조의 출범연맹산하 69개 언론노조를 하나로 묶는 산별로의 확대 개편작업이 본격 시작됐다. 부산일보 KBS를 시작으로 언론산별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CBS는 권호경 사장 퇴진을 위한 파업투쟁에 돌입했다. 중앙일보는 인쇄노조원 123명을 집단 해고해 연맹은 여름 내내 홍석현 회장 구속을 외치며 거리를 휩쓸고 다녔다. 연합과 대한매일의 소유구조개편논의도 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