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호]읽으면 행복합니다

2001-02-21     언론노련
김광규 시집 '누군가를 위하여'‘4·19가 나던 해 세밑/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반갑게 악수를 나누고/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하얀 입김을 뿜으며/열띤 토론을 벌였다/…/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부끄럽지 않은가/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또 한발짝 깊숙히 늪으로 발을 옮겼다’시인 김광규의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의 일부다. 1970년대말에 쓰여졌지만 지금 읽어도 여전히 감동적이다. 슬프도록 아름답다. 현란한 수사(修辭)도 아니고, 핏발 선 외침도 아니건만 이 시의 감동은 가없이 그윽하다. 사람을 편안하게 하면서도 무언가 지금 나의 삶을 다시 한번 추스르도록 해준다.이번엔 따스한 시인 김광규의 시선집을 소개한다. '누군가를 위하여'. 1980년 중반 이후의 대표시 70편을 골라 담았다. 4·19세대인 시인은 현재 한양대 독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김광규의 시는 단정하고 담백하며 따스하고 진실하다. 결코 현란하거나 난해하지 않다. 1975년 등단 이후 7권의 시집과 3권의 시선집을 낼 정도로 왕성한 시작(詩作)활동을 해온 시인. 그는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늘 깨어있는 정신으로 투명한 시를 써 온 보기 드문 시인이다. 그래서 한 문학평론가가 “아침 나절에 맑은 정신으로 또박또박 써내려간 것이 바로 김광규의 시편들”이라고 상찬(賞讚)했던 것 아닌가.김광규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노래한 ‘일상시’의 영역을 개척한 시인이다. 일상이라는 것이 자칫 시의 소재로 어울릴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광규의 시를 읽으면 이러한 선입견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극명하게 드러난다.‘겨울밤/노천 역에서/전동차를 기다리며 우리는/서로의 집이 되고 싶었다/…/눈이 내려도/바람이 불어도/날이 밝을 때까지 우리는/서로의 바깥이 되고 싶었다’('밤 눈' 중) 참 따스하지 않은가. 읽는 사람에게 참으로 쉽게 다가오지 않는가. 일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 그 일상을 그려낸 그의 시는 관념적이지 않다. 그리고 난해하지 않다. 이것이 그의 시의 가장 큰 매력이다. 사실 일상시라는 용어를 들이밀지만 어쩌면 김광규의 시는 어떤 이론이 필요없다. 그 자체로 좋은 시다. 그의 시는 쉽고 편안하지만 행간을 잘 들여다보면 치열한 삶의 한복판에 있고 언제나 비판 정신을 늦추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87년 4·13 호헌조치가 내려지던 날, ‘마침 중간시험이 시작되던 월요일/…/교단에선 나 자신이/부끄럽고/창피해서/커닝하는 학생들을/잡아낼 수가 없었다/…/누가 정말로 부정행위를 하고 있는지’(‘부끄러운 월요일―1987.4.13’ 중) 하고 속죄했던 시인. 요즘의 시를 읽다보면 너무 과장된 포즈의 시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삶을 바라보는 치열함이나 냉철함은 온데 간데 없고, 꾸미고 치장하고 언어의 유희에 탐닉하는 부지기수의 시편들. 김광규의 이번 시선집은 요즘의 그런 속되기 짝이없는 시류(詩流)를 꾸짖는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김광규의 근작시 한편을 소개한다. ‘언젠가 왔던 길을 누가/물보다 잘 기억하겠나/…/여보게 억지로 막으려 하지 말게/제 가는대로 꾸불꾸불 넓고 깊게/물길 터주면/고인 곳마다 시원하고/흐를 때는 아름다운 것을/물과 함께 아니라면 어떻게/먼 길을 갈 수 있겠나’(‘물길’중) 이광표(동아일보 문화부기자) / 언론노보 300호(2001.2.21) 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