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호]언론개혁-기자들이 나서야

2001-04-04     언론노련
신문개혁, 내부의 참여는 있는가김학천 건국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신문개혁」에 대하여 일반인들은 모르는 일이 많으리라고 생각된다. 시장원리대로 돌아가는 언론을 짓누른다는 필사적인 신문들의 저항과, 무가지 배포 통제와 납세 실적 조사 정도가 개혁이라는 거창한 면제에 해당되는 일인가 하는 의문을 갖는다는 뜻이다. 더구나 순서를 맞추어 체계적으로 제기되는 것은 아니지만 큰 신문들의 떳떳치 못했던 과거나 소유와 관련한 신문의 내부적 자유에 관한 쟁점들이 신문의 본질에 얼마나 불가결한 요소이며 개혁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가히 혼돈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된다.이런 현상이 나타나기까지는 개혁 대상 신문들이 우격다짐으로 버티는 기득권 유지 대책과, 일은 벌여 놓고도 분명한 개혁순서를 또박또박 이행하지 못하는 정부 쪽의 자세에도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런 혼란을 비교적 빠르고 분명하게 귀결지을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방법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그것은 신문개혁에 신문종사자들은 어떤 식으로 얼마만큼 참여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무릇 언론개혁에는 종사자들의 의견집합과 그 표시에 참여하는 일만큼 결정적인 방법이란 따로 없을 듯하다. 그런데도 이미 경영진에 포함된 간부층을 제외하고 평균적 종사자들의 개혁에 관한 목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는다. 사실상 독자들은 기자를 포함한 여타 종사자들이 언론 개혁에 관하여 어떤 쪽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길들이기 탄압」을 받는 것이라는 쪽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개혁이 궁극적으로 그 소중한 내부적 자유에 접근하는 방법이라고 이해는 하지만 거칠기 그지없는 고용관행에 묶여 그저 묵묵히 귀추만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의아스러운 것이다. 개혁이라는 거창한 용어는 피하더라도 언론이 분명하게 눈에 보이는 결함을 털어내게 하는데는 종사자, 내부의 참여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왜냐하면 왜곡된 시장의 개선이나 소유자의 논조 간여를 배제하는 일이나, 강한 곳에 강하고 약한 곳에 관용으로 대하는 신문기능을 되살리는 일 등이 궁극적으로는 「언론 내부의 자유」를 확립하는 일과 연결된 세태를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외부의 권력과의 긴장관계는 언론사의 경영진과 종사자가 함께 걸머지는 숙명적인 멍에일 것이지만 그것 자체도 언론권력의 합리적 구성이 아니고서는 버틸만한 힘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전체에 의견형성기능을 전파하는 당사자들의 의견에 대해서도 사회는 궁금해 하는 것이다. 물론 종사자의 고용처지를 이해하는 계층도 있을 것이다. 단순하게 생계를 건 직업인으로 이해해줄 경우에 그러하다. 이미 30년이 가까워오는데 언론사 중추조직의 절반 정도를 뭉텅 잘라내고도 환갑 전후의 해직자들이 아직도 원상회복 하라고 외치면 상대편에서는 우리는 상관없는 일이다 하면서 마주보고 있는 게 현실이다. 70년대 해직자의 경우다. 그렇더라도 불특정 다수의 언론 수용자들은 언론사의 변화요구에 대한 언론경영진의 저항적 반응보다는 언론사를 형성하는 다수 중추세력의 침묵에 오히려 더 깊은 관심과 의혹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언론이란 이미 스스로 주체하기도 어려울 만큼 힘이 커져서 내부의 참여 없이는 가장 경제적이고 타당한 개선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막연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미 방송이 다소라도 변모하는 과정에서 이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방송의 변화 결과는 후한 평가를 받기 어렵게 귀결이 나는 기색이어서 아직도 절박한 개혁국면들을 드러내고 있지만 거기까지 가는 과정에서 평균수준의 종사자들이 보인 참여의 열의는 큰 것이었다. 만회하기 어려운 고용상의 타격이 걱정스럽기로는 신문과 방송이 똑같은 형편이었다. 방송의 경우는 공공성의 비중이 신문에 비해 높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교과서적 이론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서너 개의 일간지, 이른 바 중앙 일간지가 전국을 장악하고 지배하는 체제에서는 신문에 종사하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평범한 독자에 이르기까지 그 지배적인 신문들을 수지타산만이 유일한 목표인 평범한 「회사」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터이다. 필요에 따라 「사회의 공기(公器)」에서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시장물건」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신문에 대해서 좀 더 분명하고 인정받는 방향을 제시하고, 되도록 분명하고 공정한 방향으로 들어서도록 촉구하는 것이 개혁의 개요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문과 방송이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다. 그런데도 그 내부의 반응, 종사원의 참여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기이한 현상이며 별반 생산적인 전망이 보이지 않는 국면인 것이다. 언론인의 심리적 위상을 잘 정리한 서구의 학자 말레쯔케는 언론인에게는 스스로 결정한 바 자기 위상이 있다고 했다. 이 주장은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고 현실적 상황을 그대로 직시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언론인이 생활인의 입장에서 몇 가지 범주, 즉 교육자, 지사, 단순 고용인, 신념을 지닌 지식인 등의 분류가 예시되고 있다. 이 중에 스스로 선택한 입장에 따라 언론은 그 모습을 달리 한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분석에 접한 일반인은 그래도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언론인은 언론본질에 부합되는 위상 쪽을 택하고 있을 터이다. 그 쉽지 않은 개혁에 위상을 분명히 한 당사자들의 의견만큼 추진력을 갖는 요인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 언론노보 303호(2001.4.4) 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