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호]읽으면 행복합니다
2001-05-16 언론노련
부뢰, 『상하이에서 부치는 편지』이 책을 손에 쥐면 우선 표지에 써있는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힘을 다해 나의 경험과 냉철한 이성을 너희에게 바쳐 너희들의 충실한 지팡이가 되고 싶다. 어느 날, 너희가 이 지팡이가 귀찮다고 생각할 때 나는 소리 없이 종적을 감추어 절대 너희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겉장을 넘기기도 전에 읽는 사람의 가슴을 두드린다. 읽기도 전에 눈물이 난다.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잠시 상념에 빠졌다. 며칠 전이 어버이날이었고,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하는데. 나의 아버지는 며칠전, 전라북도 함열의 어느 곳으로 건설 관련 자격증을 따기 위해 연수원에 들어가셨다. 아버지의 연세는 일흔여덟. 그 연세에 사실 자격증을 딴다고 해서 큰 쓸모는 있는 것도 아닐텐데. 일흔다섯의 어머니를 홀로 남겨두고 연수원에 들어가시다니. 젊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공부하시고픈 소망이 얼마나 간절했길래, 이런 결정을 내리셨을까 생각해본다. 어머니도 처음엔 반대를 하셨지만, "아버지가 저렇게 좋아하시는데 어떻게 막을 수 있겠니" 하시면서 흔쾌히 아버지를 보내주셨다. 여든을 앞둔 노인이신데, 그곳 기숙사 생활은 괜찮을는지, 힘드시지는 않을지, 혹 고된 일정으로 편찮으시기라고 한다면. 그리고 석달동안 고향에 혼자 남게된 어머니는 또 얼마나쓸쓸하실지. 이 놈의 막내아들은 대체 무얼하고 사는 건지, 이 책의 표지만보았는데도 가슴이 무너진다. 또다시 눈물이 글썽인다. 이 책은 이처럼 사람들을 슬프게 한다. 절절하면서도 담담한 부성애가 가슴을 저미게 한다. 중국의 유명한 번역문학가이자 예술사가인 부뢰(傅雷·1906∼1966)가 세계적 피아니스트인 아들 부총(傅聰·67)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책이다. 부총이 폴란드로 피아노를 공부하러 간 1954년부터 저자가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죽게 되는 1966년까지의 편지 110통이 실려있다. 아들 부총이 올바른 인간,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성장하도록 혼신을 다했던 한 아버지의 사랑이 담백하게 펼쳐져 있다. 부뢰는 부총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자 즉시 초등학교를 중퇴시키고 가정에서 직접 엄하게 가르쳤던, 좀 독특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들에게 늘 엄격했고 스스로에게도 엄격했다. 1966년 문화대혁명 발발 초기 홍위병들이 우익이란 누명을 씌우자 부인과 함께 자살해 무죄를 주장했을 정도였다. 여기 실린 편지엔 부뢰의 엄격하고 절제된 삶의 철학이 잘 담겨 있다.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이론적 지식은 쓸모 없는 것이고 실천이 따라야 한다”, 그러면서도 “행동은 깊은 물을 만난 듯이, 얇은 얼음을 밟듯이 해야 한다.” 엄격함은 아들에 대한 진한 사랑이었다. 그 사랑은 아들의 삶 곳곳에 섬세하게 배어 있다. “러시아어는 너무 빨리 읽지 마라. 너무 빨리 읽으면 잘 기억할 수 없어서 나중에 다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들의 피아노 교육을 돕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모습, 서양음악 잡지들을 뒤지고 그 속에 실린 글들을 번역해 아들에게 보내주었던 모습도 참으로 감동적이다. 이렇게 말하는 아버지 부뢰. “아들아, 나는 너를 학대하였다. 내 양심의 부끄러움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구나. 영원히 너에게 미안할 것 같구나.”이 대목에서 나는 기어이 또 한번 울컥하고 말았다. 주말엔 곧장 함열에 계신 아버지께 달려가야겠다. 어머니를 모시고 말이다이광표(동아일보 문화부기자)/ 언론노보 306호(2001.5.16) 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