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호]CBS투쟁 승리 의미와 이모저모

2001-06-27     언론노련
9개월 처절한 투쟁 'CBS정신 지켜부적격자 사장선임 막도록 정관개정 노조안 관철무노무임 돌파, 8시간 마라톤 협상 전 조합원 환호파업 265일, 계절이 세번 바뀌는 방송사상 최장기 파업투쟁을 벌였으며 전 조합원이 9일째 단식에 돌입, 12명이 병원으로 후송됐고 마침내 우리 사회 전반이 동참해 투쟁성금이 5천만원을 돌파했던 CBS의 빛나는, 그러나 처절했던 투쟁이 종지부를 찍었다. CBS의 투쟁은 권력에 기대어 언론을 입신양명의 사유물로 전락시킨 권호경 사장의 퇴진을 위해 지난해 10월5일 215명이 전격 파업에 돌입하면서 촉발되었으나 정작 권사장을 몰아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CBS지부는 노사간 핵심쟁점이었던 정관개정을 사실상 노조측 안대로 관철시키며 사장을 선임할 때 노조의 의견이 반영되는 길을 열었고 무노동 무임금의 독소조항을 실질적 돌파하는 성취를 일궈냈다. 더욱 소중한 것은 9개월 무임금, 부부가 파출부 아파트경비 세차 아르바이트를 하는 고통 속에서 200명에 달하는 투쟁의 대오를 흐트러짐 없이 유지했으며, 거기서 굳건한 동지애를 확인했고, 한국사회의 어두웠던 시절 군사독재에 항거하던 CBS의 올곧은 정신을 지켜냈다는 점, CBS를 CBS라고 말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CBS 투쟁을 승리로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관개정은 사내 민주화에 커다란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각 교단 이사들로 구성됐던 기존 이사회에 노조를 비롯한 직원 대표 3명의 참여를 보장해 이사회의 독주를 제어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또 전문인이사제도의 도입으로 방송과 경영 등에 전문성이 확보됨에 따라 권호경 사장 같은 부적격자의 선임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직장폐쇄 등 파행적 결정으로 CBS 안팎의 우려를 자아냈던 최근 이사회의 행보도 정상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권 사장의 재임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다는 교계와 언론계 안팎의 예상이다.지부는 특별격려금과 복지기금 등으로 조합원 1인당 약 7백만원씩 지급하는데 합의함에 따라 '무노동 무임금'도 실질적으로 돌파해냈다. CBS지부는 협상이 마무리된 26일 새벽까지 209명의 대오를 흔들림 없이 유지하면서 부장급 간부와 수습사원들까지 조합에 가입하는 등 더욱 강한 조직력을 보여왔다. 특히 파업 막바지였던 지난 18일에는 단협에 의거해 현업에 투입되어있는 기술국 엔지니어를 포함한 조합원 130명이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었다. 지부는 정예현 아나운서 등 조합원 12명이 구토와 탈진으로 병원에 후송되는 가운데 협상 타결 시점까지 9일간 단식을 계속하며 배수진을 쳐왔다. 탈진자 속에는 24시간 근무를 계속해야 했던 엔지니어 조합원 9명을 비롯 여성조합원들이 다수를 차지했다.○…25일 오후 7시30분부터 8시간에 걸친 마라톤 협상을 타결 짓고 협상단이 회사로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조합원들은 새벽 4시께 사옥 도로 밖으로 마중나와 박수와 환호로 맞이하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민위원장은 "우리가 똘똘 뭉친 우리의 투쟁은 결국 승리로 끝났다"고 말한 뒤 "아홉 달 동안 월급도 못 받게 하고 밥을 9일이나 굶긴 위원장이 뭐 예쁘다고 박수를 치냐"며 오히려 미안함을 토로. ○…협상과정에서 김상근 목사는 합의의 조건으로 '충성편지 공개에 대한 위원장 사과'를 요구했으나 민 위원장은 "사실 공개가 왜 사과의 대상이냐"며 강하게 반발, 결국 '노보를 불특정 다수에게 배포한 사실에 대해 유감을 표한다'로 절충. 지부는 '권 사장의 아파트와 고향에 권력굴신과 무능경영을 폭로한 특보를 배포한 것이 아팠던 모양'이라고 평가.○…사측은 노사복지기금으로 처음 3억을 제시했다가 민 위원장이 '최소 4억' 입장을 내놓자 이를 수용. 김 목사는 민 위원장이 8시간 마라톤 협상이 계속되는 가운데에서도 흔들림 없이 조목조목 주장을 피력하자 "9일 단식한 사람 같지 않다"며 "내가 못 당하겠다"고 말했다.○…협상이 타결된 뒤인 26일 새벽 5시 30분 경에도 서울 기술국 엔지니어 전용선 조합원과 이승호 조합원이 119 구급차에 실려 홍익병원으로 후송. 지부가 복직 시한을 합의 일주일 뒤인 7월 2일로 한 것도 이와 같은 단식 후유증이 한동안 계속될 것을 우려한 때문./ 언론노보 308호(2001.6.27)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