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호]영화이야기

2001-09-12     언론노련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메멘토>아내 살해범 추적하는기억상실증 환자의복수극'메비우스의 띠'퍼즐식 스릴러의뒤엉킨 구성숨바꼭질은 어릴 때 즐기던 놀이 가운데 하나이다. '추적'을 다룬 영화는 숨바꼭질을 더욱 극적으로 확대시킨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쫓는 사람과 쫓기는 사람을 내세워 이들 사이의 뒤엉킴 전환 반전 등을 통해 관객의 흥미를 자극한다. '메멘토'(Memento)는 추적을 그린 영화다. 그러나 그 구성 방법은 추적을 다룬 영화의 전형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 기억을 더듬어 복수한다는 닳고닳은 소재를 독특한 형식으로 엮어냈다. 전직 보험수사관 레너드는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이다. 아내가 살해되던 날의 충격 때문에 무엇이든 10분 이상 기억하지 못한다. 할 일은 알지만 한 일은 이내 잊어버린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자신과 범인의 이름, 그리고 아내가 강간당한 뒤 살해되었다는 점이다. 복수에 나선 그는 모든 상황을 폴로라이드 카메라로 찍고 메모를 한다. 중요한 단서와 주의할 점은 온몸에 문신으로 새겨놓는다. 정체불명의 테디와 웨이트리스 나탈리의 상반된 조언으로 그의 복수극은 혼선을 빚는다. 이야기는 시간의 역순으로 펼쳐진다. 시간을 거슬러 구성한 점은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구체적 방식은 '박하사탕'과 다르다. '박하사탕'은 7개의 소제목에 따라 한 남자의 인생역정을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통해 그려냈다.반면 '메멘토'는 주인공의 최근 상황을 10여개의 국면(sequence)으로 나눠 시간의 역순으로 연결해 놓았다. 처음 국면의 첫 장면이 다음 국면의 마지막 장면, 둘째 국면의 첫 장면은 그 다음 국면의 마지막 장면으로 맞물리는 식으로 반복된다. 여기에다 각 국면 사이의 흑백 장면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펼쳐진다. 각 국면은 1인칭 시점이지만 흑백장면은 3인칭 시점으로 엮어져 있다. 전체 구성은 '메비우스의 띠'와 닮았다. 구성이 정교하지만 꽤 복잡하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이야기의 맥을 놓친 뒤 졸기 십상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두세 번을 봐야 전모를 알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게임을 즐기는 신세대 관객이라면 두세 국면이 지난 뒤에는 영화의 독특한 구성방식을 파악, 퍼즐식 스릴러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기억은 배반한다'거나 '기억이 필요한 건 현재의 나를 일깨우기 위해서다'는 레너드의 독백은 이 영화의 메시지에 해당된다. 주인공의 복수극과 딱히 연관이 없는, 정상이었던 레너드의 기억상실증 환자에 대한 보험수사에 얽힌 일화는 이 영화를 연출한 감독의 의중을 담고 있다. 기억은 물론 사실에 근거한 메모나 추리 역시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 영화는 지난 3월 미국 개봉 당시 스크린이 11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관객의 입소문을 타고 스크린이 약 500개로 늘어났고 흥행수입 또한 전미 박스오피스 8위까지 기록했다. 세계적인 영화정보 사이트 IMDB에서 네티즌 평점 8.9(10점 만점)를 받았으며 역대 최고영화 250위 가운데 11위에 올라 있다. 'LA컨피덴셜' '룰스 오브 인게이지먼트' 등의 가이 피어스(34)가 주인공을 맡아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 상대역은 '매트릭스' '초콜렛' 등의 캐리­앤 모스, '매트릭스' '도망자' 등의 조 판톨리아노가 맡았다. 감독은 영국 출신인 크리스토퍼 놀란(31). 그는 이 작품의 호응에 힘입어 할리우드로 진출, 알 파치노와 로빈 윌리암스가 주연을 맡은 '불면증'을 연출했다. 배장수 경향신문 생활문화부 차장/ 언론노보 312호(2001.9.12) 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