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언련 간사로부터 지역의 진보적 여성들의 문예지인 '살류쥬'라는 책을 소개받고는 직장생활을 하는 아내에게 의식화라도 시켜볼 요량으로 한권 선물했다.진보적 여성들의 문예지이니까 당연히 통일, 교육, 노동문제 등에 대해서 아내의 의식전환에 도움이 될 것이며, 나아가 나를 더 많이 이해해 주리라는 기대감에서였다.그런데 책을 선물한 다음날 저녁 퇴근한 아내가 가사분담을 하자며 아예 밥도 안차려주고 시위(?)를 벌였다. 자기가 여태까지 잘못 살았다나 어쩐다나. 직장 여성치고 자기처럼 가사에 충실한 여자가 없다며... 아예 저녁부터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세탁기 돌리고, 내일부터 저녁은 알아서 해결하란다. 자기는 퇴근 후에 스포츠댄스 배우러 다닐 거라며.그 책을 보니까 자기처럼 사는 사람이 없더란다. 책 내용을 감수하지 않은 내 탓을 후회하기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그 책에는 가부장 사회의 모순을 지적하며 여권신장을 부르짖는 내용으로 가득한 한마디로 불온(?) 서적이었다.그리고 또 한마디. "마누라 해방도 못시키면서 무슨 노동해방이냐"고. 한마디로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한다.그날 저녁 정말 열나게 깨졌다. 나도 하루아침에 잘 안되니 차차로 잘 하겠다며 우선 설거지는 내가 책임진다며 겨우 사태를 수습했다.그날 설거지를 하면서 곰곰이 따져보니 사실 아내 말이 별로 틀린 것도 없었다. 출퇴근 2시간 이상 걸리는 장거리로 나다니면서 아침 일찍 출근하는 남편 아침밥 꼬박꼬박 챙겨주랴... 주말마다 농삿일 거든다며 시골에 내려가고... 그렇다고 남편이 다정다감하길 하나... 휴가를 같이 보내기를 하나... 상집위 회의다. 보고대회다. 파업이다. 민언련 이사회다. 민주노총 교육이다. 민주동문회 모임이다 등등. 이틀이 멀다하고 늦게 들어오고 늦게 와서는 TV리모콘만 잡고 있으니... 아낸들 무슨 보살도 아니고 열불 안나게 생겼나.깨놓고 보면 진보적 인사도 아니면서 툭하면 민주니... 통일이니... 언론개혁이니... 민중해방이니...(여성해방 소리는 절대로 안한다). 나도 참 문제 많은 모순덩어리다.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한달에 단 하루라도 내 손으로 저녁상을 준비해야겠다. 진심에서 우러나는 마음으로 밥그릇 국그릇을 닦으면서 내 마음속의 허위의식도 하나씩 걷어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비록 작심삼일이 될지라도.이학수 전국언론노동조합 경남신문지부 사무국장/ 언론노보 316호(2001.11.14)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