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에서, 동지들을 생각하며청량한 가을 하늘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바람결에 실려오는 가을의 풍요가 메마른 수감자의 가슴에도 한 줄기 따사로운 정감을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며칠 전 운동장에 나갔더니 뒤늦게 꽃을 피웠던 민들레가 떠나갈 길이 멀고 바쁜지 채비를 서두르는 듯 잎사귀가 노르스름하게 물들어 가더군요. 이제 높은 하얀 담벼락을 넘어 또 겨울은 찾아오겠지요. 저는 지난 10월 4일부터 앞으로 얼마가 될지 아직은 기약할 수 없는 새로운 징역살이를 시작했습니다. 상당기간은 동지들의 곁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동지들과 함께 활동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망일 뿐, 이제 동지들의 활동을 조용히 지켜보며 이곳에서 내가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이 찾아 열심히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비록 떨어져 있지만 동지들과 항상 함께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옥중에서 맞이하는 언론노조 창립 1주년은 왠지 이채롭습니다. 밤을 낮 삼아 전국을 누비던 동지들의 피땀을 모아 언론노조 깃발을 올렸던 게 엊그제 같은 데 벌써 1년이군요. 뒤돌아보면 지난 10여 년 동안 민주노조운동을 지키기 위해, 또 중앙조직을 세우고 합법화를 이루고 위해 우리는 참으로 피 어린 투쟁을 벌여왔습니다. 지난 5년 동안 한국노총 조합원이 33만 명이 줄어 87만이 됐고, 민주노총은 20만을 불려 61만에 이르렀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만, 저는 민주노조운동은 이미 승리를 거둔 지 오래 라고 보고 있습니다. 문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노동계급 내부 분화 등 노동운동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이며, 그 조직대안은 바로 산별노조 건설이며 이미 대안은 현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언론노조를 비롯해 민주노총 안에는 이미 22개의 산별노조가 탄생했고 조합원수도 22만에 달해 전체의 40%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지 여러분께서 산별노조 1년을 직접 몸소 겪으셨듯이 조직은 형식 뿐 아니라 내용을 올곧게 채울 때 제 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 노동운동이 부딪히고 있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언론의 경우 중앙과 지방언론사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내부의 통일과 단결을 이루는 문제는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또 산별노조에 걸맞은 산별교섭을 실현시키지 못하는 한 산별노조 건설의 진가는 한계가 뚜렷합니다. 나아가서 노조 안에서 본조와 지부, 지회의 구실과 권한을 정확하게 세우는 등 조직정비 문제도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저는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지 여러분을 언제나 굳게 믿습니다. 가야 할 길이며 이 길 말고는 다른 지름길이 없습니다. 아니 세계사에 그 예가 없었던 기업별노조에서 산별노조로 가는 길을 우리는 당당하게 개척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딪힌 어려움은 최선의 방법을 찾아 헤쳐나갑시다. 운동을 해볼수록 결국 어려운 가운데서도 내딛는 한 발자국만큼만 세상은 변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되새기게 됩니다. 언론산별노조를 굳건히 세우는 일이야말로 지금 이 시대 역사발전을 위해 동지 여러분이 해야 할 사명이라 할 것입니다.떨어져 있는 기간이 비록 아쉽기는 하지만 우리들의 보다 큰 성숙과 많은 보람을 만드는 시간이 될 수 있으리라 믿으며 이만 아쉬움을 달래고자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생활하고자 합니다. 항상 밝고 힘차게 살아갑시다. 동지들의 건투를 빕니다./ 언론노보 317호(2001.11.28)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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