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언제오는데. 다른 집 아빠들은 애들 데리고 영화구경, 놀이동산 간다고 난린데 " "엄마, 오늘 유치원가는 날이야? 엄마, 학교에 가지마라" 아들의 말. 토요일은 원래 유치원이 쉬는 날이다. 먼저 아이와 현관문을 나서는 마누라는 "잠도못자고 무슨교육이야, 일은 일대로 하고 노조에는 다른사람 없데?" 내심 안스러워 하는 말이다. "내일 늦게 오겠네 잘 갔다와."나는 빛도 나지 않는 조합활동을 하면서 바쁘게 보낸다. 회사에서는 해결할 생각도 없는지 아무런 반응도 없는데, 꼼지락대는 바퀴벌레 신세처럼 처량했다. 그런데 세상에 참 희한한 것은 바퀴벌레 신세를 자청하는 무리들,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내던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다.민주노총에서 2박 3일간 선전학교 전문과정 3기가 금요일부터 교육은 시작됐지만 첫날 참가하지 못했다. 밤을 꼬박 새워 신문을 만들고 다음날 아침 교육장에 도착했다. 잠을 못자 두눈은 뻘겉게 불을 뿜고 정신은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런 것은 지난번 언론노조에서 교육을 받은 적이 있어 생소하지는 않았다. 교육은 밤늦게 까지 이어졌고 빡빡한 교육일정에 불만을 내뿜는 이들도 있었다.교육은 조별로 나눠 진행됐고 하루 늦게 교육에 참가한 탓에 조원들과 어울리지 못했지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 걱정이 앞선다 내가 과연 노조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여섯 살인 내 아들 병헌이는 요즘 탑 블레이드를 가지고 놀다가도 전화가 오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빠 회사에가?" "누구야?" " 회사가지 마라..."하며 애절하게 바지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니 마음 약한 나는 어디를 비빌 언덕으로 삼고 살아가야 할지.그렇다. 밤새워 일하면서 월급이라도 많이 받으면, 일은 죽어라 하지만 돈을 못 번다는 거다. 아, 정말 20대라면 다시 열심히 할수 있으련만. 그러나 정말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어떤 문제도 '성숙하게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관행이다. 우리는 언제 성숙한 회사에서 능력을 발휘할수 있을까. 시기도 못 맞추고 방식도 구태의연한 정부도 한심하고 이에 대응하는 사주들은 우리를 괴롭게 만든다. 이해관계가 걸리지 않은 일을 논의할 땐 '군자연'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걸리면 소인배 중의 소인배가 되어 버린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우리 사회는 정말 하수에 속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운용의 기본틀인 정치와 언론이 하수라는 사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우리를 더 슬프게 하는 것은 이런 현실이 쉽사리 개선되지 못하리라는 예감이다. 내가 속한 회사의 미래는 왜 이리 씁쓸하고 찝찝한 것일까.보통 새벽 3시면 일이 끝나는데 어떤 날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땀을 뻘뻘 흘리며 한없이 누워있을 때가 있다. 온몸이 천근만근 되는 듯 방바닥이 나를 끌어당긴다. 막막함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우리 회사는 미래가 없다'며 한숨을 내쉴 때가 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은 오래가지 못한다. 병헌이가 밖에서 들어와 배 위에 올라탄다. 그러면 나는 숨을 길게 내쉬며 아이의 눈을 바라본다. 마냥 즐거워하는 아이를 보면 가슴속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던 힘이 다시 솟아 오른다. 그래, 다시 해보자. 내일 병헌이의 밥을 먹이려면 지금 일어나야지...이해동 한국일보지부 조합원/ 언론노보 318호(2001.12.12)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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