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라는 것이 사실은 말이 그럴싸하지 애매하기 짝이 없다. 자성이나 자괴, 자율, 나아가 도덕이니 상식이니 하는 것들도 추상적이기는 매 한가지다. 그럭저럭 인간의 순수성이 살아있다고 여겨질 때, 그것들은 믿음을 주었지만 점차 법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구석진 곳으로 밀려났다. 지금은 자정이라는 것이 여론으로부터 면죄부를 구성하는데 요긴하게 쓰일 뿐, 본래의미는 색이 바랠 대로 바래졌다. 정치자금 파동이 일면 얼마안가 으레 자정선언이 나왔고, 방송사 프로그램의 선정성 문제, 교사들의 촌지문제, 공무원의 부패, 직장내 성추행문제, 아무튼 뭔가 곪은 것이 터질 때마다 자정선언은 뒤따랐다. 남들의 상처를 들출 것도 없이 언론인의 촌지문제는 자정의 단골메뉴였다. 언론노조 기자협회 PD연합회 등 언론관련 단체에서 자정선언은 범람했고 대부분 선언적 의미에 그쳤다. 그런 와중에 민주당 휴가촌지사건, 한나라당 명절촌지사건이 잇따라 터졌고, 언론노조는 산별 1주년을 맞아 촌지관행에 쐐기를 박는 구체적 자정선언을 발표했다. 취재원으로부터 1만원 이상의 금품을 받지 말 것이며, 수수사실이 밝혀진 사람은 명단을 공개하겠다는 실천강령 및 제재조항을 담은 것이 특징이었다. 늘 자정이라는 것이 모호하여 처음으로 선언을 넘어 실천을 강제토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차도 없이 러시아 발 촌지사건이 또 터졌다. 야당 총재에게 "춘추관에서 만나자"고 찬가를 부르니, "돌아갈 때 선물이나 사라"고 몇 푼씩 쥐어줬다는 것이다. 그 입과 손이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널리 회자됐던 "사장님 힘내세요"가 자본에 대한 굴종이라면, 이번 '용비어천가'는 견제와 감시의 대상임이 분명한 정치권력에 대한 직무유기이며, 자기비하라 할 것이다. 자정선언이 23일 발표됐고, 불과 이틀 후인 25일 찬가를 부르고 촌지를 받았으니, 하물며 이국 땅인 바에야 모르쇠 할 것인가.언론노조는 언론개혁의 요체가 자정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함을 재차 강조하며, 누가 낯뜨거운 입을 놀렸으며, 누가 낯부끄러운 손을 내밀었는지 반드시 밝혀내어 명단을 공개하고, 자정선언 본래의 뜻을 실천해 나갈 것임을 분명히 천명한다./ 언론노보 318호(2001.12.12)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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