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 차세대 기수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투견장 판돈 둘러싼 두 여인의 생존투쟁풍성해진 화면 비해 여운은 전작 못미쳐'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힘의 대결은 라이벌 이야기의 효시'라고 했다. 이렇듯 경쟁관계는 역사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 사랑이나 돈 영토 등 목적이 무엇이든 그것을 놓고 벌어지는 라이벌 대결을 다룬 작품은 유사이래 영화 소설 연극 등에 넘쳐난다.경쟁관계를 그린 이야기는 그 과정과 결과를 예측할 수 없을 때 흥미롭다. 대등한 힘을 가진 이들의 한판 승부는 물론 '톰'과 '제리'처럼 상대가 안 돼 보이는 두 세력간의 대결도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전자보다 더욱 흥미로울 수 있다.'피도 눈물도 없이'는 두 경우를 모두 다룬 작품이다. 강자들과 약자들 등 힘의 강도가 제각각인 세력들이 얽히고 설킨 가운데 펼쳐지는 돈가방 쟁탈전을 그렸다. 그런 만큼 흥미가 배가될 수 있었지만 이도 저도 극대화시키지는 못했다. '수진'(전도연)은 라운드 걸 출신으로 권투선수였던 투견장 건달 '독불'(정재영)에게 맞으면서 살고 있다. 눈 밑 상처를 감추려고 늘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그는 가수가 되는 게 꿈이다. 한때 금고털이로 이름을 날렸던 택시기사 '경선'(이혜영). 그 역시 취객의 성희롱과 악덕 사채업자의 등쌀에 편할 날이 없다. 어딘가에 있을 딸을 찾아 함께 살고 싶다.자동차 사고를 계기로 알게 된 '수진'과 '경선'은 투견장 판돈이 든 가방을 훔쳐 달아날 모의를 꾸민 뒤 실행에 옮긴다. 그런데 이 돈을 노린 놈들이 한둘이 아니다. '독불', 야누스적인 암흑가 두목 'KGB'(신구)와 그의 수하 '침묵맨'(정두홍), 퇴물 해결사 '칠성파'(백일섭·김영인·백찬기), 어린 양아치 '채민수'(류승범) 일당, 여기에 은퇴를 앞둔 형사 '마빡'(이영후)까지 뒤얽힌다.투견장, 도시 뒷골목 등을 배경으로 한 아귀다툼에 유혈이 낭자하다. 특히 투견장은 제목 그대로 피도 눈물도 없는 곳이다. 물고 물리는, 먼저 물어 상대의 숨통을 끊어버리려는 투견들의 모습은 등장인물들을 상징한다.제작진이 내건 장르는 '펄프 느와르'(Pulp Noir). '느와르'의 무거움과 '펄프'의 가벼움을 조합한 변종 장르이다. 느와르와 코미디를 넘나드는 기법으로 돈가방을 놓고 벌어지는 생존투쟁을 다뤘다. 거금을 차지하려는 육탄전이 끔찍하고, 꼬이고 꼬이는 상황에 몸부림치는 모습이 웃음을 낳게 한다. 국내에 개봉된 가이 리치 감독의 '스내치'(Snatch), 형제인 래리·앤디 워쇼스키 감독의 '바운드'(Bound) 등과 닮았다. 풋내기에서 늙은 여우까지 각양각색의 인물이 뒤얽히고 부분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뒤집는 드라마 구성, 다양한 영상 등은 '스내치'를 떠올리게 한다. 전과자였던 택시기사와 건달 동거녀가 거친 남자들과 갖는 돈 싸움은 '바운드'를 연상시킨다. 전도연·이혜영·정재영이 온몸을 던진 열연을 펼쳤다. 신구·백일섭·김영인·백찬기·이영후, 류승범 등 개성 있는 인물들의 캐릭터 열전도 눈길을 끈다. 무술감독 정두홍의 카리스마 넘치는 액션연기도 볼만하다. 릴레이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충무로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류승완 감독의 실질적인 장편 데뷔작이다. 제작·투자사의 든든한 지원을 받은 만큼 화면은 풍성해졌지만 인생과 사회에 대한 풍자가 남기는 여운은 전작에 못 미친다. 여주인공을 내세운 데 따른 메시지도 강렬하지 않아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어쨌든 류감독은 차세대 기수로서 다음 영화에 대한 기대감은 저버리지 않았다.- 배장수 (경향신문 생활문화부 차장)/ 언론노보 324호(2002. 3. 6) 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