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으면 행복합니다-이태호의 『한국의 마애불』1천 3백년 세월 녹아있는 불상 이야기바위의 일부이자 한 몸이고 땅과 자연의 일부인 마애불최근 국보 84호 서산 마애삼존불(6세기경 백제) 자료를 볼 기회가 있었다. 깊은 계곡 개울가에 은거하듯 숨어있는 마애삼존불. 전체적인 표현이 매우 단정하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중용의 아름다움. 백제인들의 미감이다. 본존불의 미소는 더욱 아름답다. 네모진 얼굴에 큰 눈, 살짝 벌린 입으로 번져나오는 미소가 해맑고 복스럽다. 그러면서도 고풍스러움의 품격이 살아 있다. 돌(바위)에 새긴 불상 마애불. 우리가 여행을 하다보면 깊은 산 속이나 산 정상에서 혹은 마을 근처의 야산에서 종종 만나게 된다. 그 마애불을 잘 들여다보면 우선 편안함이 느껴진다. 그 편안함을 다시 한번 음미하고 싶어 『한국의 마애불』을 빼들었다. 6세기 백제시대부터 19세기 조선시대말까지 1300여년간 제작된 전국 곳곳의 마애불 200여구를 사진과 함께 간략하게 소개한 책이다. 마애불에 관한 일반적인 개론도 들어있다. 물론 이 책은 지나치게 마애불 사전 같은, 더러는 마애불 관광 가이드북 같은 인상을 주어 좀 아쉽긴 하다. 그러나 국내에 마애불 관련 본격 저작물이 없는 마당에 이 책은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노천박물관이라 불릴 정도로 불교 유적이 즐비한 경주 남산의 마애불을 눈여겨 보았다. 불화 파노라마를 연상시키는 둘레 40m의 남산 탑곡 마애불 불상군, 수십길 벼랑 위에 당당하게 앉아 경외감을 한껏 풍기는 신선암 마애보살상.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마애불은 남산 삼릉계 선각(線刻) 육존불이다. 오랜 세월로 인해 바위에 절로 생겨난 선과 불상을 표현한 인위적인 윤곽선이 어울리려 구상과 추상의 절묘한 조화를 보여준다. 마치 현대미술을 보는 듯하다. 높이가 무려 17.7m에 달하는 경기 파주 용미리의 고려 마애불입상도 빼놓을 수 없다. 바위에 몸체를 새기고 그 위에 별도로 조각한 얼굴을 올려놓은 독특한 모양이다. 이 마애불은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온다. 그렇게 높은 곳에서 큰 몸집으로 고려인들을 지켜왔다. 외양은 좀 촌스럽고 투박하지만 편안하다. 서민적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장황하게 마애불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마애불이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미술 장르의 하나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서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동안 변변한 책 하나 없을 정도로 무심했다는 반성도 하고 싶었다. 마애불은 돌을 독립적으로 떼내와 그것으로 불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바위를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둔 채 거기에 불상을 새긴 것이다. 그래서 마애불은 여전히 바위의 일부이자 바위와 한 몸이고, 땅과 자연의 일부다. 마애불은 바위의 형상, 바위의 질감을 그대로 남겨놓는다. 그러니 마애불은 원초적으로 소박하고 자연친화적이지 않을 수 없다. 자연과 맞서지 않고 자연과 하나 되어 불심을 구현하고자 했던 우리 옛 사람들의 평화로운 마음이다. 그래서 선인들은 마애불을 만들면서 특별하고 화려하게 치장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소박하지만 진실한 신심(信心)을 담으려했던 것이다. 많은 마애불이 인간적이고 편안하게 다가오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길 떠나기 좋은 계절, 이 책과 함께 마애불을 만나러가고 싶다.- 이광표(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 언론노보 325호(2002. 3. 20)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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