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 방송의 공적 책임과 독립성, 공공성은 어느 누구에게도 담보가 될 수 없다.
태영건설 워크아웃과 SBS 대주주 지분 담보 제공에 대하여
지상파 민영방송 SBS의 대주주 태영그룹 핵심 계열사인 태영건설이 막대한 채무를 갚지 못해 결국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워크아웃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사태 속에 언론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 방송 공공성 이행 등 무거운 사회적 책임이 있는 지상파 방송 SBS의 대주주 지분마저 담보로 제공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 과정에서 이익은 사유화하고 비용과 책임은 국민에게 떠넘기려는 대주주의 무책임한 행태는 엄청난 비난에 직면했고, 지상파 방송 대주주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광범위하게 제기됐다. 태영그룹 오너 일가를 향한 이 같은 국민적 분노는 단순히 태영건설 워크아웃을 둘러싼 일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태영은 87년 민주화 대투쟁과 언론자유화 물결 속에 지난 1990년 지상파 민방 사업자로 선정됐다. 지상파 독과점의 시대에 엄청난 사회적 영향력을 갖게 되는 민방사업자 선정은 그 자체로 특혜였고, 방송의 힘을 바탕으로 고도 성장을 이뤄냈다. 국민들에게 이름조차 생소하던 태영그룹이 30여년만에 자산 11조원 대의 재벌로 성장하고 대주주 일가는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지상파 SBS의 영향력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태영건설 워크아웃에 이르는 과정에서 대주주가 보여준 ‘견리망의(見利忘義)’, ‘남의 뼈를 깎는 행태’는 언론노동자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광경이다. 태영이 SBS에 투자한 자본금은 창업 당시 300억과 2008년 지주회사 전환 당시 80억이 전부로, 방송을 등에 업고 이룬 막대한 사적 이익은 거의 재투자되지 않았다. SBS의 세전이익 15%를 사회에 환원하기로 한 설립허가 조건을 이행하지 않았다가 2004년 재허가 탈락 위기를 겪기도 했다. 또한 이명박 정권 당시 4대강 보도 통제와 태영건설의 4대강 공사 수주, 지난 2015년 위안부 피해자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체결된 한일합의 당시 박근혜 정부를 도우라며 내려진 대주주발 보도지침 사건, 건설 경영난 해소를 위한 SBS 방송 사유화 등 방송의 사회적 책임과 공공성, 공정성을 파괴하는 대주주 일가의 전횡으로 물의를 빚은 일이 부지기수다. 결국 지난 2017년, 윤세영 창업회장과 아들 윤석민 회장은 SBS 불개입을 선언하며, 방송 관련 직위에서 영구히 물러난 바 있다.
이처럼 사적 이익을 앞세운 대주주에 맞서 지상파 방송의 책임과 언론 공공성을 지켜내기 위한 방송노동자들의 투쟁이 없었더라면 지금 태영건설에서 비롯된 위기는 이미 SBS를 집어 삼키고 윤석열 정권의 방송장악 의도와 맞물려 지상파 방송 초토화로 이어졌을 것이다. 방송과 공익에 쓰여야 할 이익 빼돌리기에 맞서 십수년 간 끈질기게 전개한 수익구조 정상화 투쟁, 부당한 방송개입과 공정성 훼손에 맞서 쟁취한 방송사 최초 사장 및 보도, 시사부문 최고 책임자 임명동의제도 등 소유 경영 분리 원칙을 제도화하고 방송독립과 공공성을 지키려 싸워온 노동조합과 방송노동자들의 역할이 방파제 노릇을 한 것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태영은 윤석민 회장의 2세 승계와 그룹지주사인 TY 홀딩스 설립 이후 SBS 노사단체협약까지 파기해 가며 사장 임명동의제도를 폐기시켰다. 특히 태영건설의 경영위기가 가중되는 와중에도 윤석민 회장이 직접 각서까지 제출해 방송통신위원회에 확약한 SBS 소유경영 분리와 방송 공공성 이행 약속을 SBS 재허가 조건에서 삭제하기 위해 전방위 로비를 전개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국민적 피해가 가중되는 건설 부실 앞에 두고 뒤로는 SBS를 완전히 사유화하려 골몰하는 행태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
태영그룹과 대주주에 경고한다. 방송사 대주주의 사회적 책임을 망각한 채 건설부문의 경영 위기 해소를 위해 공공재인 지상파 방송의 기능과 인력을 동원하려는 시도는 꿈도 꾸지 말라. 특히 SBS를 태영건설처럼 망칠 요량이 아니라면 소유경영 분리의 원칙을 다시 대내외에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재허가 조건 완화를 노린 부도덕한 행동을 중단하라. 또한 대주주의 경영전횡과 방송독립성 침해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사장임명동의제도를 즉각 복원하라. 담보로 잡힌 것은 당신들의 사유재산일 뿐 지상파 방송 SBS의 공적 책임, 공공성, 그리고 언론자유가 아니다.
방송통신위원회도 마찬가지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정부여당을 중심으로 방송 공공성과 언론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들을 무력화하려는 시도가 이어져 왔다. 특히 전임 이동관 방통위 시절 경영자율성 강화를 명목으로 방통위가 SBS에 부가한 소유경영 분리 조건을 재허가에서 폐기하려는 움직임까지 노골화된 바 있다. 대통령의 선배 검사 출신 김홍일 위원장의 불법적 2인 체제 아래 대주주발 부실 경영과 지상파 방송 공공성 파괴를 확산시킬 의도가 아니라면 지금 상황에서는 더 강력한 소유경영 분리 조건을 부가하는 게 정상이다. 그렇지 않다면 방통위의 존재이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 될 것이다.
윤석열 정권은 들으라. 태영 건설의 위기 해소를 볼모삼아 민영방송 SBS까지 길들이거나, 장악하려 한다면,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부적격 저질자본에 대한 YTN 특혜매각 추진, 공영방송 낙하산 사장 임명과 재원 흔들기, 방송심의제도를 통한 위헌적 검열 시도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언론자유 파괴 행위로 인해 당신들의 속내를 모르는 국민들이 없다.
태영건설 워크아웃 개시는 대주주 입장에선 눈 앞의 위기 모면일 지 몰라도 대한민국 지상파 방송의 독립성과 공공성, 나아가 방송독립, 언론자유와 직결되는 중요한 분수령이다. 이 과정이 대주주의 사익을 앞세운 불순한 의도로 왜곡되거나, 권력의 방송통제 언론장악 도구로 악용된다면 언론노동자들과 시민들의 엄중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2024년 1월 12일
전국언론노동조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