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방송산업에 만연한 뿌리 깊은 차별에 온 몸을 던져 싸웠던 故 이재학 PD가 희생된 지 정확히 5년이 지났다. 그러나 우리 방송현장은 그의 억울한 죽음 뒤에도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지난 설 연휴 기간, 반년 가까이 지나 알려진 故 오요안나 기상캐스터의 비통한 사연은 그래서 우리를 더 깊은 분노와 참담함에 몰아넣고 있다. 고인의 사례는 대한민국 방송현장에서 작동하고 있는 구조적인 비정규직 차별, 이로 인해 일상화된 비인간적인 무한 경쟁 체제, 사용자의 오만과 무책임까지 민낯을 다 드러내고 있다.
故 오요안나 기상캐스터의 유서가 1월 27일 공개되고, 이튿날 MBC 사측은 입장문을 발표했다. 용납할 수 없는 가해와 책임회피의 언어들을 나열했다. 몰랐다, 고인이 자신의 고충을 털어놨다는 관계자가 누구인지 유족이 알려달라, ‘유족이 원한다면’ 진상을 조사하겠다 등등. 한술 더 떠, 이 사안과 관련해 MBC 사측의 태도를 지적하는 사람들을 향해 “‘MBC 흔들기’ 차원에서 접근하는 세력들의 준동”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명백한 2차 가해다.
고인은 생전에 MBC 관계자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했고 사망 전에도 여러 불안 징후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MBC 사측은 직장 내 괴롭힘의 발생 여부에 대한 인지, 이에 따른 후속 대처 등 필요 조치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9월 고인이 사망한 후에도 이렇다 할 내부조사도 진행한 바 없었다. 고인의 유서가 뒤늦게나마 공개되자 내놓은 입장문은 희생자와 유족, 고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시민들까지 모욕하는 것이었다.
윤석열 정권의 무도한 언론탄압에 맞서 MBC를 지키자며 어깨 걸고 싸운 언론노동자와 시민들에게 MBC 사측은 무어라 말할 것인가. 윤석열과 내란세력이라는 거악과 맞선다는 이유로 일터 안의 일상적인 차별과 혐오,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은 뒷전에 미뤄도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은 아닌가. MBC를 지키고자 나섰던 수많은 시민 대다수가 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이며, 차별과 혐오에 저항해 온 노동자들임을 사측은 직시해야 한다.
방송 비정규직을 대하는 공영방송의 책임은 방송을 통해 그들의 고통을 드러내고 고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공적 자산인 공영방송은 뿌리 깊은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노동환경을 스스로 개선하고 인권을 보호함으로써 말과 행동의 일치를 끊임없이 이뤄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사회가 수많은 희생과 기회비용을 치러가며 공영방송을 지켜야 할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MBC 사측은 고인과 유족에게 가한 모욕적 언사, ‘세력’ ‘준동’ 운운한 2차 가해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 MBC 사측이 신뢰 회복을 위해서라도 유족이 원하는 투명한 방식으로 진상조사에 착수해야 한다. 고용노동청도 사안의 위중함을 인지하고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란다.
故 오요안나 기상캐스터의 안타까운 희생은 직장 내 선후배 간 괴롭힘 차원으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고인의 죽음은 비정규직 노동자, 더 정확히는 방송산업 내 ‘위장 프리랜서’ 노동자의 피눈물 나는 현실과 맞닿아 있다.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임금과 불안정한 고용, 외주화의 흐름 속에서 ‘병’과 ‘병’이, ‘정’과 ‘정’이 서로 경쟁하고 갈등하게 만드는 구조가 뿌리 깊다. 그 구조 속에서 노동인권은 땅에 떨어지고 득을 보는 건 오직 방송 사용자들이다. 비용 절감을 위해 비정규 노동자를 양산하고 필수업무에도 무차별적으로 비정규직을 확산하는 관행은 방송산업을 착취와 혐오, 차별이 난무하는 비정규 백화점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노동조합 차원의 투쟁도 투쟁이지만, 합법을 가장해 죽음을 부르는 이 비정한 관행의 사슬을 방송 사용자가 끊지 않는 한 우리는 제2, 제3의 희생을 피할 길이 없다.
故 오요안나 기상캐스터의 죽음을 두고 방송사의 책임을 추궁하며 비난했던 정치인이 여럿이다. 그러나 법과 제도를 개선해 무분별한 비정규직 사용과 차별·착취를 규제해야 할 정치의 책임은 아무리 지적해도 모자람이 없다. 이번 사안에 입장을 밝혔던 여야 정치인들은 더욱 책임 있게 방송 비정규직 문제의 개선을 위해 입법에 나서야 할 것이다.
내일(2월 4일)은 故 이재학 PD 5주기다. 고인 역시 故 오요안나 기상캐스터와 똑같은 위장 프리랜서였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은 故 이재학 PD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 구조를 깨기 위한 중단 없는 투쟁을 다짐했다. 중단은 없었지만 발걸음이 늦다는 지적이 많다. 우리의 늦은 발걸음이, 더 넓게 펼치지 못한 비정규직 보호의 우산이 반복되는 희생 앞에 너무도 죄스럽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은 책임을 통감하며 방송산업, 나아가 미디어산업 내 비정규직 노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에 더 박차를 가할 것을 또 한 번 다짐한다.
故 오요안나 기상캐스터의 명복을 빈다. 유족 분들께 깊은 애도의 마음을 전한다.
2025년 2월 3일
전국언론노동조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