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범의 <슬픈 궁예>궁예에 드리워진 편견 걷어내기난폭한 성격잦은 국호변경미륵신앙은의도적 폄하"왕건에게 패배한 궁예는 역사 속에서그렇게 왜곡되었다"요즘 TV 드라마 '태조 왕건'의 인기가 대단하다. 난세라면 난세였고 역동적이었다면 역동적이었던 후삼국시대, 왕건 궁예 견훤 등 3인의 영웅호걸이 펼치는 각축전이 볼 만하다. 지금 단계에서, 가장 비중있는 인물은 역시 궁예다. 궁예의 삶에 있어 절정기라고 할까.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궁예의 운명은 서서히 파국으로 접어들 것이다. 점점 더 광포하고 괴팍한 성격이 부각될 것이다.우리는 궁예를 그렇게들 알고 있다. '삼국사기' '고려사'와 같은 관련 역사서에도 궁예는 악인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따금씩 이런 의문이 들 때가 있다. 궁예가 정말로 그렇게 난폭했을까. 혹 누군가에 의해 왜곡된 대목은 없을까.이번에 소개하려는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궁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저자의 주장을 따라가보자.첫째, 궁예의 난폭한 성격. 궁예는 의심을 일삼았고 부인 강씨와 두 아들을 죽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광폭함이 궁예 성격의 전부인 듯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말년의 성격일 뿐, 이것만으로 궁예를 파악하는 것은 옳지 않다.후대의 사가들은 이를 두고 궁예가 신라왕(헌안왕 혹은 경문왕)의 서자로 태어나 왕실에서 버림받은 충격, 그 정신분열의 결과로 이해해왔다. 이것은 잘못된 시각이다. 실제로 궁예가 왕의 아들이라는 설도 확실치 않다.둘째, 잦은 국호 연호 변경. 궁예는 불과 십수년 사이에 국호를 고려 마진 태봉으로, 연호를 무태 성책 수덕만세 정개로 바꿨다. 이렇게 이름을 자주 바꾼 것을 놓고 사람들은 후대는 궁예를 광인이라 불렀다. 그리고 이것 역시 그의 출생에서 비롯된 정신불안의 결과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궁예의 잦은 국호 변경은 시의적절하고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첫 국호를 고려로 정한 것은 초기 점령지역이 고구려의 옛땅이라는 사실에 주목한 결과였다. 이후 신라 백제 지역을 영토로 편입시키면서 고구려 중심의 국호를 바꿔야 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를 모두 포함하는 마진(대동방국이란 뜻)으로 바꾼 것은 그래서 옳은 선택이었다. 국호 변경은 고구려적 요소와의 결별이자 삼국통일의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고구려계의 불안감과 반발을 가져왔고 이때부터 왕건의 역모가 시작됐다. 셋째, 궁예의 미륵신앙에 관해. 사람들은 궁예가 스스로 미륵불이라고 자처한 것을 놓고 과대망상이라고 폄하해왔다. 하지만 궁예의 미륵불 사상은 당시 지배방법의 한 형태였을 따름이다. 궁예의 미륵신앙만 유독 잘못된 것으로 보려는 시각은 의도적인 편견이다. 저자의 견해는 단호하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낸 행위는 분명 역모였다. 역모였기에 정당성이 부족했고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궁예의 약점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 패배자 궁예는 그렇게 역사 속에서 왜곡되었다…." 물론 저자의 주장이 모두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 역시 정밀한 검증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이 책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궁예에 드리워진 편견을 걷어내고 궁예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고 우리를 재촉한다. 이는 왕건 중심의 역사, 즉 기존 역사관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바로 이 책의 의미다./ 언론노보 290호(2000.9.27.) 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