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노보 복간에 부쳐

새로운 처음의 역사로



<언론노보>의 부활은 분명히 지나간 '처음'의 되살림이 아니라, 새로운 '처음'의 역사여야 한다. 하루 이틀도 아닌 5년만의 부활이 우연일 수는 없다. 그것은 필경 민주언론운동 또는 언론노동운동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요구하는 필연의 결단일 터이다.
물론 언론노동운동의 지나간 '처음'도 참으로 위대하였다. 이땅의 노동운동이 무릇 민족과 민주의 문제와 절연될 수 없었던건 역사의 숙명이 아니였던가. 걸핏 무관해 보이는 노동의 기본권과 노사의 평화도 기실 민족과 민주의 함수에 맞물려 있었던 탓이다. 따라서 모든 노동운동이 민족의 재통일과 사회의 민주화를 그 과녁으로 삼았던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 가운데서도 더욱 언론노동운동은 종사하는 업무의 특수성과 보편성으로 말미암아 여느 영역보다도 다른 무게로 민족민주언론운동을 펼쳐야만 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에 와서 되새겨지는 '처음'이었다. '처음'은 물론 '처음' 그 자체만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그로부터 이어지는 언론노동자들의 뼈저리고 피맺힌 투쟁이 비로소 그날의 '처음'을 위대하다고 부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제넘음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지나간 '처음'을 이어야 할 오늘의 언론노동운동이 그날만큼 눈부시다고 우겨댈 수는 없다. 군소리는 줄이고자 한다.
5년 전, <언론노보>가 <미디어 오늘>에 그 몫을 넘기던 날의 지면을 보라. '곧은소리'는 "다시 처음처럼"을 외치지 않았던가. 그날 이미 언론노동자들의 결집인 언론노련은 '처음'의 퇴색과 희석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확대해석이거나 비약일지도 모른다. 나는 <언론노보>의 부활소식을 들으면서, 문득 두가지 뜻을 떠올렸음을 고백한다. 하나는 <미디어 오늘>이 추구해야 할, 언론비평지로서의 독립성과 <언론노보>가 펼쳐가야 할 연맹지로서의 운동성이다. 그 두 미디어가 병진하고 상호보완하면서, 상승의 효과를 거두게 되리라는 기대이다.
또 다른 하나는 <언론노보>의 부활이 갖는 상징성이다. 왜 오늘에 이르러 언론노련이 언론노보>의 부활을 결단했을 것인가. 묻지도 않은채 제멋대로의 넋두리를 늘어놓게 되어 민망하지만, 그 바탕엔 필경 언론노동운동의 새로운 지평, 새로운 '처음'을 열어야 한다는 각성과 결의가 담겨진게 아닌가.
그렇다면 다시 태어나는건 <언론노보>만이 아니다. 역시 미디어는 실체를 반사하는 거울이다. 실체인 언론노련 또는 언론노동운동이 다시 태어나고 있으므로 그 만사의 거울인 미디어가 부활하게 되었을 터이다. 나는 끝내 그렇게 믿고자 한다.
어떤 이들은 민주화의 진전을 노래하기도 하지만, 노동의 현실은 상처투성이다. 설령 IMF사태에 전적인 책임을 전가한다 하더라도, 언론노동자들의 기본권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가운데서 생존과 자사이기에 기울어지는 풍조가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가. 그 마당에 언론노동이 내걸었던 '처음'의 핵심인 민주언론의 깃발은 초라하게만 보인다.
한마디로 다시 태어나는 <언론노보>는 이제 새로운 '처음'을 여는 언론노동자들의 난상토론장이 되어야 한다. 거기서 닦인 이론과 전략과 전술들이 새로운 언론노동운동 또는 민주언론운동을 생산하고 추동하는 원천으로 자라나야 한다.
부활은 복고일수만은 없다. 지나간 '처음'과 새로운 '처음'이 역동적으로 만나는 변증법적 창조라야 한다. 나는 그 실증의 풍경을 <언론노보>에서 확인하고 있다.


<277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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