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언론사별 노조 결성, 88년 언론노련 창립 뒤 열 두 해 남짓 민주노조운동이란 큰 울타리 안에서 동고동락해온 나로서도 낼모레로 성큼 다가온 언론산별노조 출범이 '경이'로운 게 솔직한 심정이다.지난 세월동안 언론 노동자들은 제조업 노동운동과 함께 호흡을 맞추며 민주노동운동을 이끌어온 사무직 노동운동의 주축이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금속산업연맹 조차도 아직 '연맹'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있는 이 때, 단위노조와 조합원 대다수 식구들이 함께 '우리는 먼저 산별로 간다-' 거침없이 나아가는 당신들은 노동운동의 역사 앞에서 어깨 으쓱 자랑해도 괜찮을 얼굴임에 틀림없다. 이 날이 있기까지 밤을 낮 삼아 마음 조리며 뛰어 다니고, 때로는 술에 절어 격론을 벌이고, '좌절'을 영양분 삼아 헤집고 다녔을 '선구자'들에게 '정말 고생 많았다'고 위로하고 싶다.내친 김에 언론산별노조가 제대로 된 힘을 쓸 수 있는 산별노조로 갔으면 하고 바란다. 기업별 노조 운동의 한계가 워낙 뚜렷해서 내용이 좀 부족하더라도 산별노조 체계를 조금만 갖춰도 기업별 노조에 비해 뚜렷이 구별되는 장점을 발휘하는 게 사실이다. 아니 냉정하게 말해 형식으로라도 무늬만이라도 산별노조로 나아가는 게 결코 만만치 않은 게 현실이다.하지만 이런 산별노조는 우리가 진정으로 지향할 목표는 아니다. 더 질 높고 활기찬 언론민주화운동, 언론 노동자의 권익보호, 정치세력화와 사회민주화…. 우리는 기업별 교섭에서 기업별 노조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크고 중요한 과제들을 해결하려고 산별노조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상대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산별노조를 만들었다고 해서 곧바로 산별교섭이 열리지는 않는다. 아니 산별노조를 만들 때까지 기울였던 노력 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기울여야만 산별교섭을 열고, 이 교섭에서 크고 중요한 과제들을 다루고 해결할 산별단협을 쟁취할 수 있다. 산별노조로 넘어갈 당시에는 이런 저런 조건을 따져 곧 바로 갈 수도, 조금 돌아갈 수도 있으나 결국은 이 문제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산별노조 건설과 운영과정은 산별교섭과 산별단협을 체결할 수 있는 힘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자면 기업별노조로 출발해 산별로 나아간다는 한국의 특수한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산별노조 조직원리에 충실한 조직체계를 갖춰야 할 것이다. 현장에 뿌리 내린 조직, 민주주의 원리를 충실히 하면서도 사람과 돈을 중앙에 집중해 닥치는 문제를 끌어안고 해결해 나갈 능력을 갖춘 노조를 만들어야 한다. 특히 냉정한 현실일 수밖에 없는 운동은 능력과 열정을 갖춘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돈'을 빼고는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을 실사구시 자세로 해결해야 한다.더 나아가서 수 십 개 기업별 노조를 단순히 합친 단일노조가 아니라, 기업별 노조 운동 방식에서는 함께 하기가 쉽지 않았던 더 많은 언론 노동자들을 끌어안아 더 강한 언론노조가 돼야 한다. 그러자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이제는 당당한 산별노조 조합원으로 조직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산별노조가 된다면 해서 저절로 힘이 생기지는 않는다.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기에 이런저런 현실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겠으나, '원칙'으로 접근하고 실현 가능한 것부터 성실하게 실천했으면 한다. 민주노총 안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는 산별노조와 외국 산별노조의 활동경험을 들여다보면 어느 정도 덩치가 돼야 거대한 자본을 상대할 수 있다는 소박한 상식을 확인하게 된다. 우선은 언론산별노조 건설이 급하겠으나 언론노조가 산별의 완성인가 하는 점도 차근차근 따져 발전방향을 잡아야 할 것이다.뒤돌아보면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스스로 대견해 하다가도, 앞을 내다보면 '첩첩산중'인 게 인생사요 운동이 아닌가 생각에 젖을 때가 많다. 글 주문이 '언론노조에 바란다'여서 '첩첩산중' 얘기를 더 하게 됐으나, '여기까지 온' 언론 동지들에게 정말 따뜻한 동지애를 더 드리고픈 게 솔직한 마음이다. 지금까지 해온 정성과 열정, 나 한 사람이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꾸역꾸역 하루하루 실천하는 만큼만 역사가 나아간다는 지금껏 간직해온 신념이라면 제 아무리 '첩첩산중'이라도 어찌 넘지 못하랴./ 언론노보 292호(2000.10.25) 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