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명 비장한 각오로 노조 간판 세워전문지로는 처음으로 산별 돌파"창립 1년 첫 단협 목표는 편집국장 직선제"1999년 11월 24일, 송파구 가락동 소재 한 음식점. 잔뜩 힘이 들어간 어깨에 뭔가 큰 일을 낼 것 같은 비장한 얼굴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지금부터 언론노련 산하 한국농어민신문노동조합 설립총회를 시작하겠습니다" 개회 선언과 함께 시작된 이날 회의는 짜여진 각본(?)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노동조합 규약이 제정되고 노동조합을 이끌어갈 초대위원장과 임원들이 만장일치로 선출됐다. 20년 한국농어민신문의 역사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과연 우리가 해낼 수 있을까" 스물스물 가슴 한 구석에서 올라오던 불안감은 눈 녹듯 사라지고 "아, 우리가 드디어 해냈구나" 서로에 대한 대견스러움으로 가슴이 벅찼다. 이 자리에 모인 조합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몰래 품고 왔던 '사표'를 엄일용 초대위원장 앞으로 내밀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 총대를 맨 위원장에게 힘을 실어주자는 조합원들의 뜻이었다. 이렇게 한국농어민신문노동조합의 깃발은 힘차게 올랐다.'순하기만' 했던 우리 조합원들은 지난 11개월 동안 '독하게' 뭉쳤다. 노조 창립의 계기가 됐던 조합원에 대한 부당 전직을 투쟁으로 철회시켰고 조합원 탄압에 앞장섰던 일부 간부들에 대한 징계도 관철시켰다. 그동안 단 한번도 지급하지 않았던 초과근로수당과 지각을 이유로 지불하지 않았던 월차수당, 96~98년 연차수당도 미흡하나마 돌려 받았다. IMF를 빌미로 2년동안 동결됐던 호봉과 임금 인상도 일궈냈다.'전임' 노조간부가 없는 상황에서, 가뜩이나 기자수도 모자른데 각자의 업무를 차질 없이 수행해가며 노조 일을 한다는 게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 모두는 힘들어도 '인간답게 사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흔들림 없이 '잘 나가고' 있다. 이제 사측과의 수많은 입씨름 끝에 아담한 노조 사무실도 하나 생겼고 지금은 첫 단체협약 체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편집국장 직선제 쟁취와 노조의 경영·인사 참여 보장이 핵심이다.또 전문지 노조로는 처음으로 언론노련에 가입한 우리 노조는 수많은 우리나라 전문지 노조의 맏형 역할을 자임하며 지난 10월 16일 산별노조 전환 찬반투표를 실시, 90%의 찬성률로 언론노련의 산별노조 전환 노력에 힘을 보탰다. 지금 우리 노조 식구는 창립멤버 14명에서 33명으로 불었다. 노조에 대한 애정과 열의가 큰 만큼 거침없이 터져 나오는 조합원들의 불만과 요구에 때론 집행부가 당혹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런 '열혈' 조합원들이 있기에 우리 노조의 미래는 밝다.앞으로도 우리 노조는 경영진의 전횡을 막고 열악한 근무환경을 개선하고, 한국농어민신문이 진정한 농어민의 권익대변지로 거듭나는 데 앞장설 것이다. 그야말로 '막강'노조의 대열에 우뚝 선 한국농어민신문 노조의 힘찬 전진을 기대하시라.김선아 노동조합 부위원장/언론노보 292호(2000.10.25)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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