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서 왜 교열 기능이 중요하냐'고 묻는 것은 '누구를 위해 신문을 만드는가'라고 묻는 것과 같다. 신문이 추구하는 최고의 선(善)은 독자들의 알권리 충족이다. 따라서 독자를 생각하지 않는 신문은 휴지조각에 불과하다. 신문에서 교열 과정은 신문의 존재가치를 부여한 독자, 바로 그들을 위한 최고의 배려다.하지만 지금 각 신문들의 교열 기능은 심각한 수준으로 위축돼 있다. 무지한 사람들이 교열의 참된 가치를 깨닫지 못한 채 '교열은 단순한 작업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판단한 결과다. 독자에 대한 배려보다는 신문사 이익을 우선시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 위험한 판단으로 인해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유산'인 우리말글이 병들어 신음하고, 그 원흉으로 언론이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독자들의 알권리와 인격권이 침해되는 일도 비일비재한다.요즘 신문들을 보면, 기사를 읽고 뜻을 헤아리는 일이 퀴즈를 푸는 것보다 어려운, 난삽한 문장이 지면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다. 또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슬프다" 하여 천붕지통(天崩之痛)이라 일컫는 부모의 상사(喪事)를 두고 "때마침(때에 알맞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고생이 더욱 컸다"고 망발을 하거나, 누구를 추어올린답시고 "그는 H그룹을 반석 위에 올려 놓은 장본인(張本人·나쁜 일을 빚어낸 바로 그 사람)이다"라며 조롱하는 일도 있다. 그러고도 신문에 정정보도 한 줄 내놓지 않는다.어디 그뿐인가. 자기네 신문의 사설이나 칼럼으로 대입 논술시험에 대비하라고 해놓고는, 정작 신문에서 띄어쓰기는 맞는 구석을 찾아보기 어렵고, 비문과 악문이 지면을 어지럽히기 일쑤다. 언어규범의 바른 잣대가 돼야 할 책임을 저버리고 있는 것이다. 일본식 한자조어나 일본말 직역투의 문장으로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을 비난한 기사는 신문의 몰염치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고도 민중의 지팡이요, 사회의 목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진정 국민 앞에 머리 숙여 사죄할 일이다.신문시장의 경쟁이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이 냉엄한 경쟁시대에서 신문이 살 길은 독자의 신뢰를 쌓는 일이다. 한데 기자의 전문가적 수준에서 다뤄진, 난해하고 난삽한 문장으로는 독자의 알권리를 충족시킬 수 없다. 몇 줄 건너 오자와 탈자가 튀어나오는 기사로는 독자의 믿음을 얻을 수 없다. 신문에서 교열 기능이 강화돼야 하는 근본적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기사의 내용이 올바른지 검열하고, 문장을 독자의 눈높이에 맞게 다듬고, 오자와 탈자를 바로잡는 교열자는 신문의 마지막 제작자인 동시에 최초의 독자다. 이들이 제 역할을 다해야 신문도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 반면 교열 기능이 위축되면 독자의 불신이 쌓이고, 이는 결국 신문시장에서 퇴출되는 비극의 불씨가 될 게 분명하다.결국 신문에서 교열 기능을 강화하는 것은 독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이며, 사회적 책임의 실천이며, 경쟁력을 키우는 지름길이다.엄민용 한국교열기자협회 [말과 글] 편집장/ 언론노보 303호(2001.4.4)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