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9월, 시민혁명의 나라,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으로 민주주의의 본고장이 된 나라 프랑스에 바로 이 시민 혁명에 엄청난 불명예를 안기고 전 국민을 내전을 방불케하는 갈등으로 몰아넣은 사건이 터진다. 이른바 드레퓌스(Drefus)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프랑스 국민을 양분시킨 가운에 반전을 거듭한 거대한 드라마였다.드레퓌스는 조국 프랑스에 대한 사랑과 군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 찬 평범한 유태인 출신의 장교였다. 그는 어느 날 프랑스 참모본부 정보국에 체포된다. 외부로 유출된 육군 기밀문서 '명세서'의 필적이 드레퓌스의 필적과 '비슷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평소 반유태주의를 표방하던 수구 신문들이 이 사건을 '터뜨렸다.' 이어 드레퓌스에 대한 근거 없는 혐의와 조작된 사실, 추측 기사 등이 연일 대서특필됐다. 그래서 프랑스 참모본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드레퓌스의 유죄를 입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 됐다. 결국 드레퓌스는 조국 프랑스를 전복하려는 국제적 유태인 '조직'의 간첩으로 밝혀졌고 결국 종신형을 선고받았다.15개월 후 드레퓌스가 진범이 아니라는 사실을 '르마뗑"지가 특종으로 보도했다. 프랑스 국민들은 둘로 갈라졌다. 드레퓌스에 대한 재심을 요구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었다. 프랑스 혁명에 반대하는 보수파, 왕정복고주의자. 군부, 과격한 카톨릭주의자, 대다수 언론들이 재심을 반대하고 나섰다. 양심적 지식인, 공화주의자, 진보적 정치인들, 사회주의자, 노동계급이 재심을 요구했으나 형편없는 열세였다.신문들 중에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한 신문이 피가로 지였다. 그리고 이 소수의 절망적인 주장 속에서 천둥 같은 목소리를 낸 이가 바로 에밀 졸라였다. 그는 신문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논설을 실어 프랑스의 각성을 촉구했다. 그의 집은 돌팔매질을 당했으며, 군법회의를 중상 모략한 죄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영국으로 망명했다. 최근 신문 개혁과 관련된 우리나라 제반 세력들의 움직임들을 보면 본질적으로는 드레퓌스 사건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언론노보 304호(2001.4.18) 1면
저작권자 © 전국언론노동조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