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제비'가 남해안에 상륙한 일요일 아침 6시. 우산을 펴들고 대구 앞산(660m)을 오른다. 우중산행(雨中山行).사정없이 내리는 비에 등산로 초입부터 바지와 등산화가 축축이 젖어온다.빗물을 머금어 잔뜩 미끄러워진 바위를 우산을 든 채 오르자니 보통때보다 갑절이나 힘이 든다. 오늘 같은 날 내가 뭐하나 싶다.그러나 30여분 땀을 빼고 능선에 오르자 앞산은 숨겨놓았던 비경을 펼친다. 맞은편 능선위로 운무가 피어오른다. 운무가 바람에 날려 춤을 춘다. 모아졌다가 흩어지고, 헤어지려다 다시 합치며 시시각각 산의 모습을 새롭게 그린다.첩첩이 쌓인 능선이 더욱 멀리 보인다. 계곡에서도 오랜만에 물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온다. 앞산이 살아있다. 낮은 산으로만 치부했던 앞산이 이렇게 웅장했던가. 산은 오묘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가 오직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만 살짝 보여주는가 보다.비오는 날 산에 가기는 처음이다. 집을 나서며 등산객은 나 하나 뿐일 것이라 생각했다. 산에 미치지 않고서야 비를 맞으며 이 꼭두새벽에 누가 등산을 할까.시내버스를 탈때도 승객들이 나의 레인 커버를 뒤집어 쓴 배낭을 곱지않은 시선으로 보는 것 같아 괜히 민망했다. 그러나 산행중에 여럿 사람을 만났다. 대부분 나같은 우산족(우산 들고 등산하는 사람)이었다. 반갑기도 하고 겸연쩍기도 했다. 등산객이 북적대는 앞산에서는 인사말을 나누는 경우가 드물다. 하지만 비가 내릴 때는 저절로 말을 건네게 된다. 우중산행을 하는 상대에 대한 존경심과 ‘당신도 참 어지간하군’ 하는 동료애를 동시에 느껴 친근감이 배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안녕하세요" 하면 그들도 쑥쓰러운 듯 "수고하십니다” 하며 지나간다. 비 내리는 일요일. 가족과 함께 있어도 외출하기 곤란한 공휴일에 한 번쯤 산을 오르는 것도 멋진 경험이다.매일신문 편집국 박현환 조합원/ 언론노보 308호(2001.6.27)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