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일했는데 비정규직에 임금 80만원"야근 마치고 낮에는 이삿짐센타서 생활비 충당인간답게 사는 작은 꿈 위해 올2월 첫 노조가입"남들 노는 일요일날 10시간씩 10년을 일하고도 고작 77만원으로 어떻게 삽니까"한국일보 평창동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황경춘(32)씨는 되물었다. 새내기 노동조합원 황씨는 홀아버지를 모시고 아내와 초등학교 1학년, 3학년인 두 딸을 두고 있다. 황씨는 92년 5월 한국일보사에 촉탁직으로 입사했다. 가족들은 황씨가 한 달 월급 30만원짜리 월급쟁이가 됐지만 전국 4대 일간지인 한국일보에 입사했다며 축하잔치까지 벌였다.전라도 농촌에서 땅만 파먹는 아버지의 2남 3녀 맞아들로 태어난 황씨는 초등학교 5학년때 병으로 어머니를 잃었다. 85년 봄 고등학교 마치자마자 돈 벌겠다고 보따리를 쌌다. 봉제공장과 자동차부품공장을 옮겨가며 하루 12시간씩 일했지만 밥값 제하고 방값 주고 줄줄이 선 네 동생들에게 학비까지 보내면 5만원도 안 남았다. 굶다시피 돈을 모았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89년 전 식구가 서울로 올라왔다. 그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올 봄 셋째 여동생까지 시집 보내준 아내가 눈물겹도록 고맙다. 한국일보 전산제작국 소부 생활 9년 3개월. 지금도 황씨의 월급은 기본급 80만원에 수당 12만5천원. 세금떼고 뭐 떼고 돌아오는 건 77만원 남짓.평생 직장이라고 들어온 한국일보에서 10년을 일했건만 여전히 비정규직. 연봉전환한 기자를 빼고도 함께 입사한 호봉직 기자는 기본급만 188만원이다. 애들 손잡고 나들이 갈 수 있는 빨간 날(일요일)은 5주가 돼야 한 번 돌아온다. 그마저 '특집이다 뭐다'하며 재수없으면 두 달을 버텨야 일요일에 한번 쉴 수 있다. 친한 친구 결혼식에도 못 가기 일쑤였다. 금같은, 옥같은 두 딸이 그 흔한 경차도 하나없는 아빠의 고물 트럭에서 차멀미를 할 때면 이 더러운 세상마저 토해 버리고 싶다.황씨는 제조업체를 떠돌던 지난 85년에도 노동조합을 경험했다. 그러나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맨발로 뛰는 기자들이 있는 언론사에 들어온 지 10년만에야 겨우 노동조합원이 됐다. 92년 입사와 함께 노조 파업을 보며 부러웠지만 자신은 가입대상도 안되는 촉탁직이었다. 황씨는 올 2월 조합원이 됐지만 편집권 독립과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던 기자 노동자는 대부분 연봉제를 받고 빠져나간 뒤였다. 92년 파업 때 노조 집회장의 전원 스위치를 내려 편집국 동지들의 파업집회를 방해한 1급 구사대였던 전기부 김씨 형님도 조합원이 됐다. 내년이면 정년인 늙은 노동자 박씨 형님도 보다 못해 그 허연 머리에 머리띠를 둘렀다. 낼 모레면 박씨 형님은 손자도 본다. 그런데도 형님은 "박정희 때부터 이 회사에 들어와서 겪었는데 더는 회장 일가를 끼고는 답이 없을 것 같아 조합에 가입했다"고 한다. 박씨에게 지난해 까지 노동조합은 빨갱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황씨는 내년 4월이면 방 두 칸에 4천만원 짜리 전세에서 벗어난다. 10년 모은 적금타서 24평 짜리 임대아파트에 입주할 꿈에 부풀어 있다. 입사 초기 30만원 월급갖고는 처자식은 고사하고 늙은 아버지 약값도 못 댈 것 같아 야근을 마친 뒤 낮에는 친척이 하는 이삿짐센터에서 이삿짐을 날랐다. 입사때부터 1만원이던 교통비가 10년이 지난 지금도 1만원이다. 5교대 근무 중 두 번은 새벽 1시에, 한 번은 새벽 4시에 끝난다. 평창동에서 부천까지 택시비만 만원이 넘는다. 몸무게 55kg인 황씨에게 500ℓ짜리 냉장고는 감당하기 힘든 짐이었지만 평생 직장이라고 들어온 한국일보가 황씨에게 준 월급으론 생활비도 모자랐다. 누구처럼 주말이면 골프치는 꿈은 아니더라도 애들이랑 영종도 바닷바람이라도 쐬는 것이라도 가능했으면 한다. 애들에게 그 흔한 컴퓨터 하나 사주는 것도 망설여진다.황씨는 "노동조합이 아니고선 그 작은 꿈마저도 실현할 수 없을 것 같았다"며 가입동기를 밝혔다. 그래서 33살 노동자 황씨의 2001년 여름 파업투쟁은 절박하다./ 언론노보 309호(2001.7.25)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