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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조직 성명/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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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기지역 출판지부 성명서] 어떠한 예술도 실재하는 인간의 존엄을 짓밟고 올라설 수 없다

등록일
2020-07-20 14:48:21
조회수
672
첨부파일
 200720-출판지부 성명서.docx (53378 Byte)

어떠한 예술도 실재하는 인간의 존엄을 짓밟고 올라설 수 없다

_소설의 사적 대화 무단 인용 사태에 대응하는 문학동네와 창비의 안일한 방식에 대해

 

최근 김봉곤 소설가의 사적 대화 무단 인용 사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보여준 문학동네와 창비 출판사의 대응 방식은, 비슷한 논란이 발생할 때마다 출판사들이 어떻게 대처했는지 그 이중성과 안일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전형적이다. 이 사태와 관련된 두 출판사가 한국 사회의 지적/문화적 주류 담론을 형성하는 장으로 기능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과연 그들이 대내외적으로 그러한 자격을 유지하는 게 맞는지 회의해야 할 만큼 무책임하고 불성실했다.

지난 10일 이 사태가 최초로 공론화되고 추가 고발이 이어진 뒤에야 두 출판사는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관련 도서를 리콜하며 판매를 중지한다고 공표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자발적이고 선제적인 대응이 아니라, 피해자들과 함께하려는 수많은 연대 행동이 있었기에 이뤄진 것임을 우리는 안다. 그들이 그렇게 미적지근하게 대처한 건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잦아든다’는 기회주의적 논리가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 「그런 생활」 속 ‘C 누나’라고 밝힌 피해자는 경력 10년의 출판노동자이기도 하다. ‘문단에서 주목받는 젊은 작가’와 ‘대표적 문학 출판사’라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권력 관계와 위계 속에서 그는 어김없이 약자의 위치에 놓이며 처절한 고통을 겪었다. 소설가가 작품을 발표하고 문학상을 받으며 다방면으로 홍보 활동을 펼치는 동안 피해자의 고통은 사실상 지워졌다. 이것은 문학의 재현 윤리나 책임의식을 말하기에 앞서, 피해자의 존엄을 정신적으로 무화하는 행태나 다름없었다.

문학동네는 ‘당사자끼리 합의되지 않았다’는 변명으로 1차 입장문을 올렸다가, 뒤이은 고발과 항의가 거세지자 2차 입장문을 발표하며 어영부영 후속 조치를 내놨다. 그러나 2차 입장문에도 피해자의 요구에 응답하는 내용은 온전히 담기지 않았다. 더구나 피해자는 상당 기간 문학동네에 재직한 출판노동자였다. ‘문단에서 주목받는 젊은 작가’가 스타성을 뽐내며 홍보와 매출에 매달리는 동안 과거 동료였던 피해자의 존엄은 처참하게 훼손된 것이다.

창비는 예전 신경숙 작가의 부끄러운 표절 사태 때에도 궤변과 비슷한 논리로 대처했다가 엄청난 지탄을 받았다. 이번에는 창비 관계자가 공개된 SNS에 ‘저이의 일방적 주장일 뿐’이라는 몰지각하고 어처구니없는 발언을 남겨 충격을 더했다. 이러한 인식과 행태가 소위 한국의 대표적 인문 출판사라는 간판에 어울리는지, 창비 경영진은 스스로 돌아봐야 할 것이다.

어떠한 예술도 실재하는 인간의 존엄을 짓밟고 올라설 수 없다. 피해자의 고발은 문학 출판계에 뚜렷하고 엄중한 문제의식을 던졌다. 이제는 최대 책임 주체인 출판사가 제대로 응답하고 조치해야 할 차례다. 아무리 경영 논리가 강하게 지배하는 조직이라 하더라도, 적극적으로 피해 사실을 파악하고 합당하게 조치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내용 증명을 받고도 꽤 많은 시간이 지나는 동안 두 출판사가 피해자에게 가해진 고통을 외면했다면, 그것은 스스로 책임 윤리를 저버리는 일이나 다름없다.

무엇보다도 우선되고 보호받아야 할 것은 바로 피해자다. 그러나 이번에도 피해자는 출판생태계의 막중한 역할을 도맡는 출판노동자로서 보호받지 못했다. 출판노동자가 있어야 출판사가 존재하며 좋은 책도 나온다. 출판노동자는 출판사나 저자의 하위 계급이 아니라, 엄연한 동반자라는 외침을 언제까지 되풀이해야 제대로 인식할 것인가. 

이 사태를 정도 이상으로 키운 책임은 출판사 내부에서 대응 방식을 결정한 결정권자와 지휘 체계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두 출판사가 앞으로도 담론 형성의 중추적인 장으로 자임할 것이라면, 피해자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보살피고 피해자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는 것이 합리적인 조치일 것이다.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출판노동자 개인에게 책임을 씌운다면 우리는 역시 분노할 것이다. 끊임없이 강조하건대, 출판노동자는 출판생태계의 중요한 주체이자 구성원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이것은 비단 문학동네와 창비만의 문제가 아니다. 책이라는 매개체로 대중과 호흡하려는 모든 출판사에 요구하는 책임의식이다.

2020년 7월 20일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 출판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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