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록일
- 2024-09-19 14:52:47
좋았던 회고담, 아니면 지금 필요한 쓴소리
바비 젤리저, 파블로 보즈코브스키, 크리스 앤더슨 지음, 신우열⋅김창욱 옮김. <저널리즘 선언: 개혁이냐, 혁명이냐>, 오월의봄, 2023년. Barbie Zelizer, Pablo J. Boczkowski, C. W. Anderson. The Journalism Manifesto. Polity, 2022.
<저널리즘 선언>.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이 책은 근대 사회의 도래와 함께 정착된 사회적 필수 제도로서 언론이 가진 결점을 폭로한다. 영미권 언론학계를 대표하는 세 저자, 바비 젤리저, 파블로 보즈코브스키, 크리스 앤더슨은 넓어져만 가는 언론의 이상과 실제 사이의 간극을 파고든다. 저자들은 제도로서 언론을 지탱해 온 핵심 가정인 자율성, 중심성, 응집력, 영속성을 더 이상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언론 제도가 직면한 문제를 진단하면서 저자들은 엘리트, 규범, 수용자 등 언론 제도와 사회의 접점에 주목한다. 이 책의 분석은 언론이 얼마나 사회와 동떨어져 있는지, 그리고 언론 영역에서의 엘리트, 규범, 수용자에 대한 오랜 집착과 오독이 어떻게 제도적 혼란을 초래했는지 드러낸다.
엘리트 측면에서의 난제는 엘리트 중심 뉴스 관행의 극복이다. 저자들은 언론이 엘리트로부터 얻은 정보를 토대로 엘리트 수용자를 위해 뉴스를 생산한다고 꼬집는다. 미국의 트럼프나 브라질의 보우소나루처럼 민주적 가치와 이상에 역행하는 정치 지도자의 부상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엘리트 균열’과 ‘민주주의 퇴행’ 현상은 이 뉴스 관행이 가진 문제를 악화시킨다. 저자들은 또한 언론계가 금과옥조로 여겨 온 규범이 환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시대에 뒤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의 취재 행위와 따로 놀기 일쑤인 규범에 집착하는 바람에 오늘날 언론인들은 실세상보다는 “역사책이나 기념 회고록”(43쪽)에 어울리는 존재가 되어 간다는 것이 저자들의 설명이다. 수용자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저자들은 언론계의 상상, 아니 믿음 속 수용자와 실제 수용자의 뉴스 이용 관행은 동떨어져 있다고 말한다. 언론인들이 오랫동안 당연시해 온 수용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언론이 갈수록 사회와 무관해지고 있다는 신호는 한국에서도 감지된다. 그들만의 리그가 된 ‘단독 표시’가 일례다. 콘텐츠 범람 속에 내 노동의 산물, 그것도 가치 있는 결과가 더 눈에 띄길 바라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당연하다. 그런데 독자들은 이제 ‘단독’ 표시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서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단독’ 표시를 단 기사 중에 독점적이고 독창적인 정보를 담거나 중대한 가치를 가진 특종도 있겠지만, 너무 많은 ‘단독’ 표시에 그 가치는 도매금으로 절하될 수밖에 없다. 단독의 의미를 두고 독자와 기자 사이에 놓여 있는 이 거리감은 “사회와 무관”(155쪽)해진 한국 언론의 한 단면이다.
이 책이 특히 문제시하는 것은 경쟁 그 자체가 아니라 경쟁의 규칙이다. 기자, 언론사 간의 경쟁은 저널리즘이 사회 안에 자리매김하는 동력으로 기능해 왔다. 그런데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그 경쟁을 통해 성취하고자 했던 열매가 어느 정도는 늘 사회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언론은 무엇을 두고 경쟁하고 있는가? 승패를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각 사는 경쟁력 확보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경쟁의 암묵적⋅명시적 규칙–이 책에서 규범이라고 칭한–이 그 존재 이유와 초점이 맞지 않다면 언론은 영점을 맞춰야 마땅하다. 언론은 자신이 속한 사회 ‘안’에서만 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곳곳에서, 특히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언론이 위기라는 것은 자명하다. 게다가 이 위기는 만연하고도 실존적이라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존폐의 기로에 선 언론에게 제시한 개혁과 혁명, 두 노선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저자들은 언론이 개혁 노선을 따른다면 제도적 근본이자 숭앙의 대상인 자유민주주의를 뿌리째 재해석한 뒤 새롭게 수용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는 특히 지금껏 언론이 누구를 배제하고 소외시켜 왔는지에 관한 반성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이 엘리트 및 수용자와의 관계 재수립 과정에서 언론인들은 포용성, 사회정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을 대안적 규범으로 삼을 수 있다.
혁명 노선은 자유민주주의 그 자체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출발한다. 저자들은 자유민주주의가 제한해 온 저널리즘적 상상력이야말로 오늘날 언론의 제도적 위기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가정에 도전함으로써 해방적인 정치 해결책을 다채롭게 모색할 수 있다”(143쪽)고 본다. 혁명의 길은 엘리트가 전혀 없는 저널리즘, 이상적 규범을 거스르고 현장에서의 쓸모를 우선시하는 저널리즘, 모두를 위한, 하지만 특히 오랫동안 주변부에서 뉴스를 읽고 보고 들어온 소외된 이들을 위한 저널리즘을 지향한다.
개혁과 혁명, 두 노선 모두 언론에게 ‘거듭남’ 수준의 변화를 요구한다. 이 정도의 변화가 아니고서는 제도로서 언론의 발전, 아니 생존을 장담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이처럼 이 책은 쓴소리로 가득하다. 현직 언론인 입장에선 잔소리로 들릴 것도 같다. 각종 이론과 사례를 들어 구구절절 언론인 일에 참견하고 꾸중한다. 그런데 참고 읽다 보면 애정이 느껴진다. 좋았던 과거의 회고담을 듣기보다 애정이 느껴질 지금의 잔소리가 더 필요할 때다.
한국언론정보학회 미디어이론과현장 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