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으면 행복합니다매화 주제 시와 산문… 손종섭 엮음『내 가슴에 매화 한 그루 심어놓고』봄이오는 남녘, 섬진강변으로 떠나고 싶은 계절책장 가득 절개와 무욕(無慾)의 매화향기 피어단원 김홍도의 그림 중에‘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란 게 있다. 참으로 시정(詩情) 가득한 명품이다. 강에 배를 띄어 놓은 두 남자가 술상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 앉았다. 강 건너 뒤편 언덕에 매화나무 몇 그루가 꽃망울을 머금고 있는데 그 꽃망울이 보일 듯 말 듯하다. 그림의 구도를 보면, 왼쪽 아래엔 배를 타고 매화를 즐기는 두 남자가 있고 그림의 중간 위쪽엔 언덕과 매화나무가 위치해있다. 그리곤 나머지가 온통 여백이다. 그 여백을 통해 은은하게 전해오는 매화 향기. 한참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물안개에 젖어들 듯 저기 강 건너에서 매화향이 전해오는 것 같다. 그 향이 코를 타고 뇌를 타고 끝내는 온 몸으로 퍼진다. 다소간의 환각을 느끼며 급기야 나는 그림 속의 주인공이 된다. 문득, 지금이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 가는 계절임을 깨닫는다. 저 남녘 섬진강변으로 매화 나들이 떠나고픈 계절이다. 설흔(雪痕)은 아직도 역력한데 그것을 배경으로 꽃망울을 터뜨리는 매화. 그래서 매화는 희망이다. 절개와 무욕(無慾)의 상징이다. ‘지금 눈 내리고/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이육사의 ‘광야’ 중)처럼 암울했던 시절에 시인 이육사에게 희망을 준 것은 바로 매화였다. 시인 묵객들은 그렇게 매화를 선호했고 선승(禪僧)들에겐 매화를 그리는 것이 수도의 한 방편이었다. 이 책 『내 가슴에 매화 한 그루 심어놓고』는 섬진강이든 어디든 매화를 탐하러 떠날 때 주머니에 찔러 넣고 가기에 제격이다.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매화를 주제로 한 시와 산문들을 모아 엮은 것으로, 읽는 데 그리 큰 부담이 없다. 편안한 책이지만, 우리 선인들이 매화와 함께 하면서 어떻게 매화의 지조있는 삶을 배우고 그 향취 가득한 삶을 살았는지를 엿볼 수 있다. 작품들은 대개 매화처럼 맑고 투명하게 살고 싶어하는 바람이 담겨있다. '남쪽 가지의 싸늘한 꽃/눈을 얻어 더욱 정신이 드네'라고 노래한 강희맹처럼.이 책에 매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등장하지만, 최고를 꼽으라면 단연 퇴계 이황일 것이다. 도산서원 한 구석에 매화를 심어놓고 꽃이 필 때면 달이 이울도록 꽃나무 곁을 빙빙 돌았던 퇴계. 그러나 병이 위독해지자 깨끗지 못한 모습을 매화에게 보일 수 없다며 매화분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했던 퇴계. 그리곤 “매화분에 물 잘 주라”는 말 한 마디를 유언으로 남겼다고 하니, 그의 매화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퇴계 시의 한 대목. ‘산창에 기대서니 밤기운이 차가워라/매화 핀 가지 끝에 달 올라 둥그렇다/봄바람 청해 무엇하리? 가득할 손 청향일다’. 책에는 멋진 매화 그림과 사진이 함께 들어 있어 책읽는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단원의 '주상관매도'에서 차분하고 담백한 시정을 느꼈다면, 전기의 ‘매화초옥도(梅花草屋圖)’를 보고는 마치 겨울산의 설경(雪景)처럼 매화의 흐드러지게 화사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좀 과장하면, 넘기는 책장마다 실로 매화 향기 가득하다. 잠시 어수선한 일상을 등지고 거기 푹 빠져들고 싶다. 매화처럼 살고 싶다. - 이광표(동아일보 문화부기자)/ 언론노보 323호(2002.2.23)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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